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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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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빈
댓글 0건 조회 1,384회 작성일 25-02-03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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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

- 야마자키 세이타로 著, 「여백 사고」 를 읽고 -


 우리는 무언가를 채우는 데 익숙하다. 빽빽한 하루 일정, 쉼 없이 채워지는 일, 넘쳐나는 정보들 속에서 잠시 멈추는 순간은 그저 불안함 혹은 불필요한 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야마자키 세이타로의 ‘여백 사고’는 이러한 현대인의 강박을 부드럽게 흔들어 놓는다. 그는 여백을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창조성과 여유를 키우는 필수 요소로 바라본다. 마치 여백이 있어야 글자가 돋보이듯, 우리의 삶에도 무언가 비어 있고 이를 통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저자는 특히 ‘채움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효율성과 성과에 집착하며 여백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한다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이는 대부분이 여백을 말 그대로 무언가 비어 있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단순화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백이 없으면 생각할 틈도, 새로운 가능성이 들어설 자리도 없어진다. 흔히 동양화의 아름다움으로 꼽는 ‘여백의 미’도 이러한 설명과 맞닿아 있다. 그림 속 빈 공간은 단순히 아무것도 채워 넣지 않은 공백이 아니라, 관찰자로부터 감상의 깊이를 더하고 해석의 자유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우리의 일상에서도 ‘여백의 미’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잠시 고민해 보니 생각보다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진정한 여백의 가치는, 처음부터 비어 있던 것이 아니라 채워질 수 있음에도, 혹은 이미 채워졌던 순간이 있었음에도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 ‘다시’ 비워졌을 때 완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 무언가를 더하려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때때로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덜어내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잠시 빌리면, ‘비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처음부터 빈 상태로 둔다는 것은, 어쩌면 최선을 다하지 않았거나 그 가능성 자체에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채워낸 뒤, 불필요하다거나, 다른 것을 위한 자리를 남겨 둬야 할 때 이를 과감히 덜어낼 수 있다면, 비로소 그 비워냄에 대한 본질이 선명해진다.

 

 또 한 가지 여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소통’이다. 하는 일 때문인지, 혹은 그 일 속에서 위치 때문인지 나는 늘 내가 우선 말을 하고 의견을 내고, 그 의견을 우리에 의해 추진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뭐 좋게 포장하면 결단력 있고, 무언가를 이끌어 갈 강단이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지만,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것들 또한 과하면 독이 된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의식적으로 가만히, 조용히, 소통 속에 여백으로 시작하고 그 끝에도 여백을 남겨보려 하고 있다. 역시 처음의 이 여백들은 내겐 상당히 불안정하고 불편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몇 번 이 여백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그동안 내가 억지로 채워 넣었던 것들에 비해 더 신선하고 유연한 것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게 여백을 한동안 지켜보았던 나에 의해서인지, 그 여백을 바라보고 다가온 타인 때문인지 혹은 그 여백을 둘러싼 다른 것들이 자연스레 번져서인지, 어쨌든 의도적 비움을 두었더니 의도치 않은 비옥함이 다가왔다.

 

 그렇게 여백이 주는 힘은 짧은 시간임에도 날카롭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오늘은 무작정 하루의 일정을 가득 채우는 습관도 한번 놓아주기로 했다. 나태함이 아니었다. 하루 속 무언가에 여백을 두는 연습을 통해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여백은, 단순한 공간과 시간의 관리법이 아니었다.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방식이며, 내가 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 맑고 순수한 철학이었다.

 

 그리고 나는, 새해에 내게 다가온 이 철학이 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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