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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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문학 장르는 참 신기하다. 보통 어떤 문학 작품이든 독자가 살아온 삶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하지만, 시는 특히 그 간극이 큰 것 같다. 소설, 수필과 달리 짧은 글 안에 작가의 의도를 꾹꾹 눌러담아야 하기 때문에 시는 나쁘게 말하면 난해하고, 좋게 말하면 신비롭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치자면 추상화에 가까운 것이 이 '시'이지 않나 싶다. 그런 난해하고도 신비로운 시들을 넘겨보던 와중, 그토록 짧은 길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내 마음에 성큼 다가온 녀석이 있기에, 여기 한번 소개해 본다.
<수채화>
우리의 결코 짧지 않았던 추억은
한 장의 수채화였나.
하늘가 회색 장막에
밤 비 쏟아지던 날
품에 안아 기어코 지켰건만
눈물 두어 방울만으로도 번져버린
우리의 그 추억 한장
위의 시는, 서덕준 시인의 시집인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에서 발췌한 <수채화>이다. 시에서 등장하는 수채화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가? 수채화는, 누군가에게는 사랑했던 연인과의 찬란했던 기억으로 다가갈 것이다. 수채화는, 누군가에게는 가족과의 즐거웠던 한때의 기억으로 다가갈 것이다. 수채화는,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다가갈 것이다. 수채화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가슴속 한켠에 지니고 있는, 언젠가는 찬란하게 빛났던 삶의 순간을 기억이라는 이름의 도화지에 옮겨놓은 마음의 그림을 뜻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림은 빛 바래기 마련이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에 우리의 마음이 그려냈던 형형색색의 수채화들은, 영원히 그 시절의 찬란함을 간직하고 있을 수 없다. 한때 자신의 몸을 마음에게 내던져 기꺼이 수채화의 밑바탕이 되어준 기억이란 도화지는, 회색 장막에 쏟아지던 밤 비를 맞아 그 빳빳함을 잃어 버린다. 아무리 품에 안아 지키려고 해도, 엉성하기만 한 우리의 손아귀와 팔로는 그 세찬 밤 비를 막을 수 없다. 비단 비 뿐이랴. 한때 불같이 사랑했던 연인들이 그려냈던 화려한 수채화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발화한 화염에 의해 그을린다. 한때 화목했던 가족들이 그려냈던 푸근한 수채화는, 그 위에 겹겹이 쌓이는 새 작품들과 도화지들에 의해 점점 망각된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함께 그려냈던, 엉성하지만 빛나던 수채화는, 화려한 아크릴화와 현대의 디지털 아트들에 밀려 어두운 도화지 창고 뒤켠에 널부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채화는 여전히 수채화다. 비에 맞아 번져버렸을지언정, 수채화는 수채화다. 화염에 그을리고, 겹겹이 쌓인 도화지들에 깔려 잊혀지고, 도화지 창고 뒤켠에 널부러져 있다 하더라도, 수채화는 여전히 수채화다. 화염의 그을림은, 그 시절의 사랑을 더 돋보이게 해준다. 겹겹이 쌓인 도화지들에서 어렵게 찾아낸 수채화는, 그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도화지 창고의 뒤켠에서 펴본 수채화는,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낸다. 망가지고, 빛바래고, 잊혀져 가던 수채화를 다시 펴 그림을 감상하면, 우리의 마음은 그 순간, 도화지를 어떤 물감으로 채워나갈까를 열심히 고민하던, 화가였던 그 시절로, 찬란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한때의 우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이윽고, 짧았던 그림 감상회가 끝나고, 수채화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그을린다. 다시 잊혀진다. 다시 빛바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수채화는 수채화다.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서, 낡아갈지언정 찢어지지는 않은 채로, 다음의 그림 감상회를 기꺼이 기다린다.
내 나름대로 시 <수채화> 를 해석하여 시적인 형태로 감상문을 써 보았다. 여담으로, 해당 시집에서 <수채화> 앞뒤로 있는 시들은 모두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아마 시인의 수채화에는 사랑에 대한 그림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길이와 함축적인 의미에 의해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시'라는 문학 작품의 특징이자 재밌는 점 아니겠는가? 내 수채화에는, 사랑 뿐만 아니라, 과거의 빛바래지 않았으면 하는 추억들이 담겨져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서덕준 시인의 시 <수채화>를 감상하며, 자신의 수채화에는 어떤 그림이 담겨 있을지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하나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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