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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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말이 그치는 곳에 침묵은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그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뿐이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꽉 차 있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그것을 채워 넣고 싶어 하지만, 그건 채움이 아니라 대체이다. 채워 넣는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그 무엇인가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매몰된다. 평소 우리는 공기를 아무런 의식 없이 들이마시고 내뱉지만, 사람은 공기에 포함된 산소 없이 5분도 채 살지 못한다. 언제나 인간 곁에 존재하는 공기라는 것, 인간의 삶을 한순간도 끊임없이 유지시켜주는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지구상 존재하는 생명체 중 유일하게 영혼과 정신을 가진 인간에게 침묵은 그 공기와도 같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말과 사고를 하지만 그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한다. 빛이 없다면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침묵 없이는 언어가 생성되지 않는다. 침묵은 소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닌, 소음의 반대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침묵은 단순한 소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하나의 소리이며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전달해 준다.
이 책은 침묵만으로 책의 모든 페이지를 채웠다. 오로지 침묵만으로 책의 내용을 구성했다는 점에 놀랐고, 침묵이 우리 곁에서 차지하는 크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 는 괴테의 일기를 첫 구절로 삼고 '침묵을 창조하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로 끝맺음한다.
세계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소음 기계장치로 변해버린 듯한 시대에, 저자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에 관한 탐구는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다시 한번 권유한다. 침묵이 사라져버린 지금, 우리는 침묵의 의미와 소중함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로써 꾸며지지 않은 나의 모습을 아무 소음의 방해 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하고 시험한다. 그래서 침묵은 인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완전한 독자적 세계이다. 그렇기에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라디오가 침묵의 모든 영역을 점령했다. 침묵은 이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침묵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바로 그 다음 잡음어가 시작되기 이전의 휴지(休止)가 있을 뿐이다.
저자는 미디어가 존재하며 잡음어가 먼저 존재하는 오늘날은 거꾸로 되었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잡음어이며 그 잡음어가 사건들을 길러낸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라디오의 잡음은 우리에게 현실이다. 이를 통해서 모든 것들이 인간 속으로 몰래 파고들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도 모르게 외부의 사상과 주관이 모두 담긴 것들이 잡음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흡수된다는 말이다.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저자는 과거 주요 매체인 라디오를 예로 들었지만 현대는 더욱 자극적인 매체가 위 말을 완벽히 호환한다. SNS, 인터넷 기사, 유튜브 쇼츠 등등.. 우리는 다양한 통로로 잡음에 완전히 노출되며 외부의 것들을 거름망 없이 빨아들이며 자연스레 내 것으로 만든다. 침묵이라는 둥지 속 품어져야 할 나의 자아는 온데간데 없고 야생 한복판에 놓인 것과 같으며 이리저리 치인다. 잡음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저자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독서. 읽는다는 행위는 반복될 수 없는 어떤 것, 살아있는 어떤 것이다. 독서는 그 자체로 침묵이며 이를 통해서 전달되는 진실은 훼손되지 않는다. 그렇게 받아들여진 진실은 잡음에 방해받지 않은 온전한 내가 자의로 해석할 수 있다. 다양한 정보 전달 매체가 발달한 오늘날, 독서가 완벽히 대체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 이유이다. 바로 지금도 책을 읽으며 마주하는 침묵이 나를 감싸며 오로지 책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나는 실체적인 침묵과 함께하며 이를 느끼고 있다.
아기의 언어는 소리로 변한 침묵이다. 어른의 언어는 침묵을 추구하는 소리이다.
아기의 경우, 말은 침묵으로부터 느릿느릿 나온다. 노인의 말 또한 완만하며 그것은 다시 침묵을 향하여 접근한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생의 첫 순간을 침묵에서 시작하고 마지막 순간을 침묵으로 마무리한다. 때문에 어쩌면 침묵이 인간의 본질임을 나타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는 일생에서 침묵이 가장 적은 시기를 지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침묵이라는 빈 어떤 것이 나의 말에 깊이를 부여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늘 활발히 이야기하며 빈 곳을 채우려 한다. 그래서일까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에 비해 말의 내용은 많지만 깊이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내가 간과했던 침묵의 소중함을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더 빨리 깨달은 것 같다. 독후감을 마무리하며 침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다시 깊이 빠져본다.
나는 왜 말을 하는가, 그리고 왜 침묵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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