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고요의 바다에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서다희
댓글 0건 조회 1,660회 작성일 24-09-17 09:38

본문

고요의 바다에서

-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


 


 맨델의 ‘고요의 바다에서’는 마치 단편집인 것처럼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912년 영국 귀족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대륙에서 자리를 잡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에드윈의 이야기, 2020년 소원해진 옛 친구 빈센트의 소식을 찾기 위해 작곡가인 친구 오빠의 신곡 발표회를 찾아간 미렐라의 이야기, 2203년 팬데믹에 관한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북투어를 위해 지구를 방문한 작가 올리브의 이야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삶의 한 찰나에 남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현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1912년의 에드윈과 1994년의 빈센트는 숲을 걷는 중 갑자기 배경이 비행선 터미널로 바뀌며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경험을 했고, 2200년 올리브는 비행선을 타러갔다가 갑자기 주변이 숲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서로의 시간과 장소가 잠깐 섞여버린 이 순간을 누군가는 녹화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소설 속에 묘사한다. 

 산발되어 있던 각각의 이야기들은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2400년 게스퍼리가 시공간을 넘어 에드윈과 빈센트, 올리브의 세계를 여행하게 되면서 비로소 하나의 큰 그림으로 합쳐진다. 




 시간연구소에서 일하는 누나를 통해 세상이 시뮬레이션으로 구성된 것일 수도 있다는 기밀을 접하게 된 게스퍼리는 연구소의 시간여행자로 채용되어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한 임무를 수행한다. 마치 컴퓨터 파일이 오염되는 것처럼 시공간이 섞여버리는 것과 같은 시뮬레이션의 오류를 찾는 것이 가장 명확한 증거이기에 게스퍼리는 이상현상을 목격했던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시공간이 잠시 섞이는 현상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로서 게스퍼리는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증거를 확실하게 갖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타인의 역사를 바꾸면 안된다는 시간여행자의 규칙을 어겨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시간에 묻혀 늙어가게 된다. 


 게스퍼리가 여행할 각각의 시대에는 저마다의 혼란이 예정되어 있었다. 에드윅에겐 전쟁에 나가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후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하는 역사가 있었고, 빈센트는 대규모 폰지사기에 가담한 남편으로 인해 숨어살다 홀로 죽게되는 역사가, 미렐린에겐 우리도 잘 아는 코로나19의 혼란이, 올리브에겐 또다른 팬데믹에 휩쓸려 사망하게 되는 역사가 있었다. 


 게스퍼리는 그들의 역사를 바꾸지 않기 위해 여행 전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외워갔다. 그는 시간여행의 취약성과 변칙이 초래할 수 있는 파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타임라인을 변경하게 되면 자신에게 내려질 불이익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눈 앞의 상대가 겪을 불행을 방관하지 못한 채, 개개인의 역사를 바꿀 조언을 건네게 된다. 그들은 덕분에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하지 않아도 되고, 팬데믹을 피해 무사히 가족과 삶을 이어가게 되는 등 평온한 삶을 유지하게 된다.



“난 또 그렇게 할 거야.” … “망설이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살고 있다면 그것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p.190

…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났을 때 그 소식에 대한 알맞은 반응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것. 시뮬레이션 안에 산대도 삶은 삶이다.

- p.347



 규칙을 어긴 게스퍼리의 잃어버린 직업적 의무와 책임감은 차치하고, 본인에게 다가올 명확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타인의 평화를 위해 손을 내민 게스퍼리의 용기는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내용을 증명해야 했던 혼란함이 가득한 임무 속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고자 한 마지막 노력이 아니었을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