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어 걸었는가, 걸었기에 길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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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있어 걸었는가, 걸었기에 길이 되었는가 ”
- 남규택 著 「직선은 곡선을 이긴다 곡선은 직선에 관심이 없다」 를 읽고 -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QWERTY 자판은, 타자기의 기계적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가장 효율적인 배열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이미 이를 뛰어넘는 효율성을 가진 다양한 자판들이 제안되었지만, 결국 사람들이 익숙하고 교육과 생산 방식이 QWERTY에 맞춰지면서 어느새 하나의 표준이 된 것이다.
바꾸어서 얻을 이익보다, 이미 익숙한 것을 버리는 비용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경로의존성
한번 어떤 경로에 들어서면 그 선택이 다음 선택의 조건이 되고, 그렇게 반복된 선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벗어나기 어려운 길이 된다. 처음에는 그저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선택처럼 여겨진다. 이렇듯 우리 삶에도 수많은 QWERTY가 존재한다.
처음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택했던 방법, 실패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 놓은 습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갖추었던 겉모습과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최선이었을 선택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익숙함이 되고, 익숙함은 다시 나를 그 방향으로 이끈다. 그렇게 오랫동안 걸어온 길 앞에서는 이제와서 굳이 다른 길로 가야 할 이유를 찾는것 조차 쉽지 않다.
무엇인가를 할 때, 이전에 잘 되었던 방법을 다시 택하는 경우가 ‘당연히’ 더 많다. 한번 성공했던 방식은 다음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고, 반대로 한번 실패했던 길에는 좀처럼 다시 발을 들이지 않는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누군가에게 믿음을 저버린 뒤에는 한층 더 경계하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경계는 대개 다음 관계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가장 익숙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 중 일부조차 오랜 시간 반복해 온 선택과 반응이 관성적으로 굳어진 결과이지 싶다.
그렇다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정말 내가 선택한 길일까, 아니면 그저 어제까지 걸어왔기 때문에 –그저 의존하며– 오늘도 걷고 있는 길일까.
경로의존성이 무서운 것은 잘못된 길을 걷게 만든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지금 걷는 길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는 데 있다. QWERTY 자판을 사용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배열이 더 효율적인지 매번 고민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손가락에 의존하여,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일까. 익숙한 방식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편안함을 준다. 그리고 그 편안함 속에서 ‘익숙하다’는 말은 어느새 ‘옳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뻔뻔하게 살아간다.
물론 매 순간 지금까지의 선택을 의심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이미 익숙해진 길은 삶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걸어왔기에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있으며, 때론 정말 유일무이한 정답이었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구원이 되기도 한다. 무조건 새로운 길을 택하는 것이 용기이고, 익숙한 길을 걷는 것이 나약함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을 걷느냐보다, 내가 지금도 이 길을 왜 선택하고 있는지를 가끔식 묻는 일인지도 모른다.
처음의 선택에는 이유가 분명했으리라. 그러나 그 이유가 지금도 선명하게 유효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과거의 나에게 필요했던 방식이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이미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이유로 놓지 못하는 것, 지금까지 잘해왔다는 이유로 계속 잘해야만 한다고 착각하는 것, 오래 알고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든 붙드는 것. 결국 이러한 방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기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무의미한 걸음만 반복하게 만든다. 지나온 시간이 길수록 돌아서는 일은 더 어려워지니까.
그러나 길을 바꾼다고 해서 지나온 길까지 잘못되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이 여기까지 뻗어 있어 나를 데려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과거의 선택이 당시의 최선이었다는 사실과 지금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오히려 지나온 길에 대한 미련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맞지 않는 방향을 계속 걷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선택에 현재와 미래까지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태도밖에 될 수 없다.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창하게 인생을 뒤엎는 일도 아니다. 그저 가끔 멈춰 서서 내가 걷고 있는 길을 바라보는 것. 익숙해서 걷는 것인지, 여전히 내가 원하기에 걷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는 것. 필요하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아직 발자국이 많지 않은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 보는 것.
QWERT는 내일도 QWERTY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익숙한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우리를 익숙한 방향으로 이끌 것이고, 때로는 그것이 편하기에 굳이 벗어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이미 나 있는 길이 언제나 가야만 하는 길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기억해야 한다. 삶에는 계속 걸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순간도 있지만, 때로는 멈추고, 돌아보고, 되돌아가야만 보이는 길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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