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여름
페이지 정보

본문
성해나 - 두고 온 여름
어제는 괜시리 넷플릭스를 들여다봤다. 뭘 본격적으로 봤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저 시시콜콜하게 뭐라도 볼까 하고 열어봤다가 찜만 몇 개 누르고 꺼버렸다. 뭘 봐도 ‘어쩐지 재미없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 이러다 놓친 영화가 몇 편일까, 결국 언젠가 내려가거나 하면 못 보게 될 텐데. 그런 생각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게 내가 원래 이렇게 우유부단했나 생각하다가 오래전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을 생각했다.
그땐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는 없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틀어주는 영화만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학교 도서관이 넷플릭스였다. 뭐 하나를 보더라도 정말 재밌게 봤다. 일정량의 수고스러움과 진심이 있었기에 좋았던 것 이다. 아마 요즘의 내가 넷플릭스를 재미없다고 여기는 것도 손가락 몇 번 까딱하면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해질수록 잊게 되는 즐거움이나 소중함이 있다. 그게 영화나 드라마가 됐든, 더 나아가서 사람이 됐든.
요새는 그런 존재가 여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 찾아오고 길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고 넘기게 되는 계절이다. 그래서 책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두고 온 여름』이라는 책에 괜히 끌려서 읽게 됐다.
책은 주인공인 기하(형)와 재하(동생)의 입장이 번갈아가며 서술되는 형식이다. 각각 사진관을 운영하는 기하의 아버지와 폭력적인 남편과의 소송으로 헤어지게 된 재하의 어머니, 두 인물의 재혼으로 엮이게 된 상황 속에서 모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벽이 느껴지도록 서술된다.
기하 아버지의 직업이 사진관 운영이라는 소재도 인상적이었다. 사진은 시간을 박제하고, 등장인물들은 그 박제된 순간을 다시 마주한다. 사진을 통해 과거가 현재로 환기되며, 과거에 자신이 ‘두고 온 것’을 생각하게 된다.
“헤어진 이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한번쯤은 더 만나도 좋을 사람. 내 삶에서 재화와 재하 어머니는 언제는 전자였다가, 언제는 후자가 되곤 했다.” - 기하 - 작품 중.
난봉꾼인 재하의 친부가 등장하고 4년 만에 가족은 다시 흩어지지만, 성인이 된 둘은 우연히 다시 조우한다. 하지만 서로의 무의식으로 다시 만나지 않게 됨을 결정하고 재하는 일본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되고, 기하는 옛날 연락처를 알려준다. 그렇게 서로가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만을 간직하게 된다.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버릴까, 멀어져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감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 작품 중.
서로의 의사가 아닌 두 형제가 친밀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일부러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을 도출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아 오히려 신선한 소설이었다. 그 시절 기하와 재하의 여름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더 여운이 오래 남은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내가 두고 왔던 여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굳이 두고 온 무언가에 대해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인연이 대부분이고,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면서 스쳐간 사람들의 근황을 SNS에 한두 번 검색해보는 게 다였을 것이다.
내가 그 시절의 여름을 두고 오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 놓아버리기로 결정한 관계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한 번쯤은 내가 두고 온 누군가, 계절, 장소 등에 대해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이전글피로사회 26.08.20
- 다음글가진 자와 못 가진 자 26.08.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