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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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심장이 시켰다.'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 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라고 하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을 말하지만 더 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각자 인생이라는 길고 긴 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틀 안에서 일상생활을 여행으로 잠시 벗어나며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액자식 구성이라고 했던가, 마치 소설의 이야기 속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의 긴 인생은 여행이라는 아름다운 액자로 꾸며질 수 있고 반복되는 일상 속 여행이라는 돋보이는 일탈로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된다, 아니 되고자 한다. 평소와 180도 다른 나의 모습과 경험은 내 삶의 액자로써 돋보이는 색을 띠며 내 삶 한켠을 차지할 것이다.
이병률 작가의 여행산문집으로 그가 직접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본 것, 느낀 것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실어놓은 책이다. 정처 없이 떠나고 마음 내키는 곳에 더 머무는 저자의 여행 모습이 더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목차도 페이지도 없고 중간중간 삽입된 많은 사진을 넣은 이 책의 모습이 저자의 여행 모습을 그대로 빼어 닮은 듯하다.
평소의 나는 엄격하고 급한 사람이다. 일이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내 통제에 벗어나는 일이 생길 때 화가 난다. 때론 이러한 일로 기분이 태도가 되어 예민해진 나를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다. '빨리빨리, 계획대로, 일정대로'의 대표인 나는 여행에 있어선 유독 느릿하고 유연한 사람이 된다. 여행 코스는 그날의 내가 가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천천히 움직이며 유독 계획에 관대해진다. 그곳의 풍경, 먹거리, 사람들, 분위기를 온 감각기관을 동원해 느끼기 위해 나의 본성 따위는 잠시 내려놓는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일본 여행으로 미루어 말하면, 사원과 게이샤 지구를 감상하고자 교토에 입성하였지만 폭우가 쏟아져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눈에 보이는 녹차 집에 자리 잡아 바깥 풍경만을 감상하였다. 사원과 게이샤는 제쳐두고 1평 남짓의 바깥 창문을 몇 시간이고 바라봤다. 정체 모를 조마 난 하천의 청둥오리와 학, 고요한 빗소리, 향기로운 녹차. 모든 계획이 틀어졌지만 화가 나기는커녕 정말 행복했다. 어쩌면 일상에 지쳐 여행에서만큼은 여유와 무계획의 미학을 즐기고 싶은 내 욕구의 분출이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나는 일본에서 소중한 액자를 완성하여 내 삶의 한켠에 진열하였고, 지금 이 글을 쓰며 그 액자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행복한 액자다. 몇십 년이 지난 뒤에 다시 보아도 변하지 않을 소중한 존재이다.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저자는 여행 중에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조용히 털어놓는다. 일본의 술집에 가든, 터키를 가든 저자가 간 곳은 언제나 당신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 당신이 꼭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삶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나도 그 순수함 속에 들어가 행복을 느낀다. 유독 여행에서 만난 인연은 기억에 잊히지 않고 이는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이는 여행을 다니는 데 있어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기 때문이다. '설레면 이기고 두려우면 진다.'라는 격언처럼 우리는 두 감정을 대립시키곤 하지만 여행에 있어선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낯선 공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설레면서 두려운 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여행이 가지는 익숙한 일상에서부터의 일탈과 낯섬과의 조우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렇듯, 여행 중 낯선 이와 맺어진 인연은 더욱 강렬하고 액자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일까 일본 현지 술집에서 우리에게 칸코쿠진?! 라며 놀라던 옆자리 아저씨와 나눈 대화는 비록 짧은 영어와 바디랭귀지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어떤 개그맨보다 재밌었고 어떠한 관광명소에 갔을 때 보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아저씨의 추천 메뉴인 '타코 와사비 아보카도'는 머릿속에 여전히 그 맛이 맴도는 듯하다.
'자꾸 모든 것에 정이 드는 걸 보니 이제 그곳도 떠날 시간이 되었나 싶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또다시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매번 여행마다 출발점에 다시 서고, 지도 위에서 경계심을 푼다. 그러고는 낯선 사람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다. 가는 곳마다 계절이 바뀌고 풍경은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는 건 역시 사람이다. 며칠간의 느릿한 나의 일탈은 액자 속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본연의 급하고 엄격한 나로 돌아왔다. 바쁘고 급한 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에 아쉬움은 없다. 나는 원래 급한 사람이고 여행이라는 액자 속에 또 다른 나를 보관한 것일 뿐이니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관찰하고 보관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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