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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ning-Kruger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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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빈
댓글 0건 조회 1,970회 작성일 24-06-1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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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nning-Kruger effect ”

- 마티아스 뇔케 著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 을 읽고 -


 인류학자 리차드 리(Richard Lee) 가 3년 동안 부시맨과 함께 생활하며 완성한 보고서에는 ‘그들이 사냥 후 돌아와서 하는 행동’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있다.

 사냥이 끝나면 부족원들은 각자 무엇을 얼마나 잡았는지 질문을 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획득한 사냥감의 수를 실제보다 줄여서 대답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존중받을 수 있는 영웅의 태도가 아니라 조롱받는 게 당연한 허풍쟁이의 행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희극에는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동일한 캐릭터가 항상 등장했다.

 ‘에이런(Eiron)’ 은 자신의 진짜 능력은 숨김으로써 스스로를 낮추는 인물이다. 반대로 ‘알라존(Alazon)’ 은 실제로는 가진 게 거의 없지만 허세를 부리는 떠벌이 캐릭터이다. 에이런은 알라존을 상대로 자신의 진면모를 늘 감추지만 결국 사기꾼 같은 그를 이기고 성공한다. 여기서 에이런이 자신을 감추며 알라존을 속이는 의도는 개인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에이런이라는 인물 유형을 떠벌이 알라존보다 훨씬 더 정교한 캐릭터로 간주했다.

 

 위의 두 사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철학적 접근을 할 수 있다.

1. 인류의 발전 초창기부터, 겸손과 절제는 생활 속에 자연스레 자리 잡은 현명과 배려의 가치였다.

2. 그래서 이런 ‘겸손과 절제’는 정말 우리의 사회에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덕목일까?

 

 전자의 접근은 이미 오랜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철학의 계보를 살펴보면 너무나도 자명해 보인다. 굳이 이름을 하나씩 나열하지 않아도 알만 한 유명한 철학자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역사상 어떤 작은 이유로라도 누군가에게 존경받은 인물들의 열에 아홉은 하나같이 ‘겸손’을 성공으로 이끄는 힘이자 그 명예를 끝까지 지켜낸 덕목이라고 말한다. 말과 행동을 배우며 인격이라는 틀을 형성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이유와 겸손함이 주는 지혜를 배우고 겸손하지 않은 이가 결국 추락하는 사례를 보며 재차 겸손해야 함을 되새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단 무언가 성공하고 어떻게든 알려졌기 때문에 그 사람의 수많은 성공의 프레임(frame) 들 중 겸손이라는 덕목이 꼭 끼어 있었던 것뿐이다. 전후 관계가 어찌 되었든,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러한 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사실은 누구나 진작에 깨우친 사실일 것이다.

 

 허나 후자의 접근은 앞서 설명한 우리 사회의 통념에 전적으로 반(反)하는 접근이다. ‘우리는 왜 꼭 겸손해야만 하는가?’ 는 말처럼 이렇게 오만한 말은 찾으려고 해도 쉽지 않을 만큼, 겸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행위는 이미 시작부터 도덕적 거부감이 든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도덕적 거부감이 ‘겸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보다 무지성으로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서, 실제로 10마리를 잡았지만 3마리를 잡았다고 말한 부족원이 있다고 해 보자. 한두 마리만 잡았거나 아예 잡지 못한 부족원들이 대부분인 만큼, 10마리를 잡은 이 부족원은 누구보다 사냥 실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부족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냥감 수를 말했고, 부족 전체의 사냥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결론에 다다른 족장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사내아이들까지도 다음날의 사냥에 동원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이 실력이 출중한 부족원은 다음날까지도 10마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채 부족원들과 사냥에 나섰고, 그날 처음 사냥에 동원된 사내 하나가 미숙한 실력 탓에 맹수에 물려 죽고 말았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단순한 인과 관계와 결론만 두고 말하자면, 사냥 실력이 출중한 한 부족원의 ‘겸손’ 때문에 결국 어린 부족원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해당 부족원이 현실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겸손’을 택했다는 모순이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꼭 겸손해야만 한다.’는 말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명분이 되기엔 충분하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겸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조금 줄어들지 않았는가?

 

 결국 겸손의 본질은 내가 스스로 결정지어 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내려 주는 포장지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위인들을 보면 그 사람이 겸손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이 그렇게 보이는 것마저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겸손하다고 느낄 만큼 출중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겸손이라는 덕목에 스스로를 강박(強迫)하여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더라면,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고사하고 누군가의 생각에 들어서 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럼 겸손하지 말고 오만해야 하는가? 아니다. 10마리를 잡은 부족원이 그날 3마리를 잡았다는 것은 기만이고, 20마리를 잡았다는 것이 오만이며, 10마리를 잡았기 때문에 내일도 10마리를 잡음과 동시에 다른 부족원들도 두세 마리는 더 잡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이처럼 기만과 오만 사이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는 것 혹은 그러기 위한 노력이 동반한 것이야말로 겸손의 덕목을 온전히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앞서 언급한 그리스 희극의 ‘능력을 숨기고 스스로를 낮추는 인물인 에이런(Eiron)’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 숨겨진 실체 사이의 괴리를 뜻하는 아이러니(Irony)’ 의 어원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아이러니는 무작정 겸손하기 위해 실체를 숨기고 이를 겸손이라 칭송받길 원하는 에이런과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연구실에서 연구를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겸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행동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선배라면, 선배로서 분명히 이만큼은 할 수 있고 이러한 것은 더 잘할 수 있다는 모습을 명확히 해야 후배는 이를 믿고 도움을 구할 수 있으며, 낯선 사냥에 홀로 나서 맹수에 큰 해를 당하는 사내아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후배라면, 후배로서 이만큼은 충분히 해낼 수 있고 이보다는 더 배울 수 있다는 모습이 명확해야 10마리를 잡는 부족원으로부터 두세 마리, 나아가 10마리 보다 더 사냥할 수 있는 기술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의 선순환은 ‘Dunning-Kruger effect’ 를 벗어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코넬 대학의 심리학자 저스틴 크루거와 데이비드 더닝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나쁜 성적이 나온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훨씬 과대평가 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결과는 가장 형편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최고라고 간주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평가와 실제 능력 사이의 차이가 뚜렷하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실제 성적이 잘 나온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다분했다. 결국 Dunning-Kruger effect는, 성적이 나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가졌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자신이 얼마나 나쁜 결과를 냈는지조차 전혀 몰랐다는 현상을 말한다.


 Dunning-Kruger 현상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자기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인지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오만함과 겸손함은 모두 잘못된 결정과 부정적인 결과로 이끌 수 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했던 겸손에 대한 두 가지 접근 중 후자의 접근에 대해 ‘아니다!’ 라는 대답과 함께 꽤나 설득력 있는 조건을 추가하여 이젠 믿고 따를 만한 철학적 접근을 완성할 수 있다.

 

1. 인류의 발전 초창기부터, 겸손과 절제는 생활 속에 자연스레 자리 잡은 현명과 배려의 가치였다.

2. 그러나 이런 ‘겸손과 절제’는 자아 혹은 대상의 능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로 인한 긍정적 결과를 모두 고려한 채 개인으로부터 표출되어야만 타의로부터 진정한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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