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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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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호석
댓글 0건 조회 2,128회 작성일 24-04-13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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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방

-롤랑 바르트의「카메라 루시다」를 읽고-

 

 

언젠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흔한 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한 마디를 기입하였다.

사진에는 피사체가 존재한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존재하기 위해선 ‘실재’하는 사물이 있어야 하기에 사물이 거기에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실재하는 파이프를 직접 보고 그렸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3차원의 현실적 대상물인 ‘실재’를 현실에서 분리하고 약호화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 ‘실재’ 자체는 아닌 것이다.

회화에서는 ‘실재’없이 상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쓰기는 이기주의의 행위이고, 읽기는 공감의 행위이다.

Writing is an act of egoism, and reading is an act of empathy

- 롤랑 바르트 -

 

현실이 존재해야만 사진이 존재하는 속성, 이로 인해 사진은 강력한 지시성과 인증작용을 갖는다. 사진은 그것의, 사물자체 존재의 현실을 말한다.

반면 언어는 기호의 조합이지만 허구와 불투명성을 지닌 매체이다. 따라서 언어의 지시성은 사진의 지시성에 비해 불투명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사물자체 의미에 관해서는 거짓말이 가능하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을 예술로 만들거나 일반화시키는 행위는 ‘Noema(그 것이 존재했음)’이 강한 사진을 진정시키고 진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진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이며 거부의 침해의 시대, 파열의 시대, 간단히 말해서 초조함의 시대, 모든 성숙을 거부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이 존재했다’는 놀라움도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 것은 이미 사라졌다.

....

나는 그 것을 목격한 최후의 증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이 책은 그 것에 대한 고풍스런 흔적이다.

- 카메라 루시다 中 -

 

 

나르시시즘의 현대적 존재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대목에서 기원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가련한 청년은 물에 비친 그림자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 자리에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이렇듯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 일화에서 ‘자화’에 대한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다수의 SNS(소셜미디어) 사용자들이 자신의 사진(selfie)을 찍어 올리는 현상도 나르시시즘과 연관된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나르키소스의 욕망이 남아 있으며 복제를 원한다는 것에 변함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메라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재현할 수 있다는 점, 화가가 아니어도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카메라 회화’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재현이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우리는 복제에 계속 집착하며 ‘카메라 회화’들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회화가 된 거울

 

‘카메라 회화’는 카메라로 얻은 복제를 현대회화적 방식으로 표현한다. 사진술의 도입으로 회화는 거울이라는 비유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으나 손 위의 작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우리는 ‘회화가 된 거울(회화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은 컴퓨터가 어느 날 카메라를 넘어서서 거울이 회화가 되도록 하는 재현의 도구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SNS 공간의 도래로 작은 컴퓨터의 ‘회화 거울’ 양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이 SNS 공간은 이쁜 ‘회화 거울’들을 모아놓고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순수한 사진전이라기보다는 ‘좋아요’라는 평가로 수치화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SNS 공간에서 다수가 ‘좋아요’ 한 게시물에는 왠지 납득이 가게 되는 경험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나도 덩달아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여러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알고리즘을 통해서 내가 계속 좋아할 만한 것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푼크툼과 SNS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은 나에게서 시작해 타인에게 전달되는 (아니면 적어도 동시에 전달되는) 비표상적 자극으로,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여기서, 푼크툼은 ‘나’에게서 시작한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좋아요’를 통해서 ‘타인’에게서 시작된 자극을 전달받게 될 위험에 처해있고 이는 개인적인 감상을 방해한다. SNS라는 거대한 장은 언뜻 개인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개인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하기 힘들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극에 찔리지 못하도록 치밀한 보호를 받고 있고 매끈매끈한 상처 없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오늘 우리에게는 반질반질 거대한 거울이 우리 모두를 비추고 있다. 그 거대한 반사에 비친 수많은 자극들에 압도당해 우리는 ‘푼크툼’을 경험하기에 더욱 주저한다. 나는 다시 우리에게 ‘거대한 회화’가 나타나 거울과의 대립이 생기기를, 우리가 상처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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