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바흐의 음악을 만나다
페이지 정보

본문
‘21세기 바흐의 음악을 만나다’
- 세르게이 말로프 내한공연 관람 후기 -
지난 4월 24일 수요일 저녁, 카이스트 대강당에서 열린 세르게이 말로프의 내한 공연을 다녀왔다. 말로프와 바흐를 평소 잘 알고 관심이 있어서 간 것은 아니고, 그저 어릴 적 잠시 접했다가 그만두었던, 추억 속에 잠들어 오랜 시간 잊혀져 있다가 우연히 재회하게 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한 그런 반가움과, 일요일마다 부모님을 따라 간 교회에서 경건한 분위기 속 장엄하고 오묘하게 울려 퍼졌던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 그것은 바흐의 음악이라고 들었던 내용이 기억이 나서 본능적으로 이번 문화행사는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시간을 내게 되었다. 인터미션 없이 이번 공연은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되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1. 토카타와 푸가 D 단조
첫 마디를 듣자마자 이 곡이 그 곡이었구나 하고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정말 유명한 첫 마디를 제외하고 원곡을 통으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첫 테마가 너무 강렬해서인지 곡의 다른 부분은 여운이 별로 남지 않았다. 이번 곡은 전자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고 활을 그을 때 쨍한 현 소리 대신 먹먹하고 웅장한 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전자스피커를 통해 은은한 울림이 번졌는데 그 장면 자체는 이색적이고 새로웠지만 연주 내내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2. 소나타 1번 G단조
이번 연주회에서 가장 좋았던 곡이었다. 눈에 익은 클래식 바이올린이 등장했고, 곡 자체도 워낙 아름답고 좋았지만, 솔로 연주자의 예리하면서도 절제된 테크닉이 빛났다. 이번 곡을 들으면서 그가 정통 바이올린 스킬은 이미 오래 전에 통달한 것 같은 노련한 베테랑임을 확실하게 느꼈는데, 특히 피크에서 과장되거나 격한 감정으로 연기하지 않으면서도 악보에 그려진 모든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곡의 흐름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오늘 이 한 곡은 마지막 한 음까지 집중하면서 감상했던 것 같다. 너무 좋았다.
3. 모음곡 6번 D장조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라는 다소 생소한 악기로 연주되는 이 곡은 전반적으로 안락하고 전원적인 느낌을 주었다. 악기는 첼로보다 작고, 비올라보다는 큰 사이즈로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놓고 활을 그어 연주하는 현악기인데 기본적으로 꽤 차분하고 점잖은 소리가 났다. 말로프는 해당 곡에서 루프 스테이션을 활용한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즉석에서 악기의 몸통을 두드리거나 글리산도와 피치카토 소리를 즉흥으로 녹음하여 반복재생을 돌려놓고 연주를 이어나가 신비롭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마 원곡에는 없고 말로프만의 감각으로 곡을 재해석하여 의도적으로 설계해서 추가한 파트인 것 같았다. 시골 농장을 배경으로 목가적인 분위기의 잔잔한 영화 한 편을 관람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곡이 길고 평화롭고 잔잔해서 중간에 잠시 몽롱하게 가라앉다가 정신을 잃을 뻔했다.
4.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 전자 바이올린과 전자음향 연주
마지막은 다시 전자 바이올린으로 돌아와 피날레를 장식했다. 바흐의 곡을 레퍼런스 한 것이 아닌 말로프의 창작 곡으로 생각되는데 전자 바이올린의 매력을 짧고 강렬하게 뿜어내는 작품이었다.
이번 공연은 고전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300년이 지난 바흐의 작품에 현대적인 해석을 곁들여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별개로, 나는 클래식 장르 음악을 들을 때마다 훌륭한 연주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진 적이 많은데, 이를테면 작곡가가 환생한듯 악보에 써진 그대로 똑같이 재현해내는 연주가 훌륭한지 아니면 문법 일부를 무시하더라도 연주자의 개성을 섞어 살려낸 연주가 훌륭한지를 자주 고민해본다. 사실 최초 창작자의 의도대로 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해내는 사람부터 많지 않고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같은 곡을 여러 프로 피아니스트의 버전으로 들어보면 분명 그들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어쩌면, 악보에 써진 그대로를 모두 지켜서 정확히 연주하되, 열린 결말처럼 작곡가가 의도적으로 악보에 빈 공간을 만들어 두면 그 부분만 연주자들이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다르게 연주해내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든다.
클래식은 다른 장르보다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나왔지만 현재까지 세계 많은 대학들이 후학을 양성해내고 오리지날리티를 유지해나가기 위해 노력하며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장르다. 단지 오래되었다는 단편적인 이유보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박자와 화음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가치 있고 이론이 튼튼하게 정립된 장르여서 현재까지 연구되고 계속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대적인 시대 흐름에 편승하여 클래식도 이제는 다양한 장르와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거나 이색적인 악기를 곁들여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개성있는 연주자들의 등장이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 이전글면도날 24.05.07
- 다음글꽃길이 따로 있나, 내 삶이 꽃인 것을. 24.04.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