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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고〮져〮 호ᇙ〮 배〮 이셔〮도 ᄆᆞᄎᆞᆷ〮내〯 제 ᄠᅳ〮들〮 시러〮 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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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빈
댓글 0건 조회 2,160회 작성일 24-05-1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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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르고〮져〮 호ᇙ〮 배〮 이셔〮도 ᄆᆞᄎᆞᆷ〮내〯 제 ᄠᅳ〮들〮 시러〮 펴디〮 ”

- 에드워드 돌닉 著 「신의 기록」 을 읽고 -


 1799년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이집트의 소도시 라시드의 잡석 더미에서, 무언가 빼곡하게 적인 돌이 하나 발견되었다. 훗날 이 돌은 ‘로제타석 (Rosetta stone)’ 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대 이집트 문명을 현대 문명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로제타석이 된다 –실제로 로제타석은 새로운 지식 분야의 핵심 단서를 지칭하는 데에 관용적으로 사용된다-.

 

 과거 프랑스는 1798년 이집트를 침공하였고 그 선봉에는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있었다. 이후 1년이 지난 뒤, 프랑스군이 나일강 삼각주의 라시드에 버려진 요새를 재건하는 도중 일부분이 깨진 커다란 돌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돌판에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그 새김글이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단락은 서로 다른 모양의 글자로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맨 윗줄은 성체자(Hieroglyph), 중간은 속체자(Demotic)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은 고대 그리스 문자였다.

 

 기원전 5000천년부터 나일강 유역의 농경 생활로 시작된 인류 최초의 문명인 이집트 문명은 이후 기원전 2600여년부터 3천년이 넘게 존속한 이집트 왕조로 그 경이롭고 화려했던 문명을 이어나갔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비롯한 수많은 이집트의 유산은 지금까지도 인류 문명의 대표 산물로 여겨지고 있는,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이 바로 ‘성체자’ 이다. 동그라미, 별, 사자, 꿇어앉은 사람, 촛대, 눈, 망치, 찻잔, 농기구, 지팡이 등 현대 문명이 보기엔 도무지 문자라고 보기 어려운 (마치 그림과도 같은) 것들은 이집트 신전의 벽, 기둥, 돌더미 어디에도 있었으며 무수히 많은 파피루스 낱장, 생활 도구, 관 그리고 심지어는 미라의 붕대에도 쓰여 있다. 이를 발견한 유럽의 학자들은 보통의 문자들처럼 부호 자체나 소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로제타석에도 이러한 성체자는 ‘신들의 말을 쓰는 글자’라고 명시되었던 만큼 그 신비함과 고결함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처음 이 로제타석이 발견되었을 때, 당시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어 부분은 쉽게 읽을 수 있었기에 나머지 읽을 수 없었던 두 부분 (성체자와 속체자)의 해독에는 며칠이면 될 줄 알았었다. 하지만 이 로제타석의 온전한 해독에는 20년이 걸렸고, 그 주역은 프랑스와 영국의 두 천재 학자들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과 토머스 영) 이었다.

 

 로제타석의 해독이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림과 동시에 언어학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이유는 그에 적힌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이 고민했던, 인류에게 있어 ‘언어’ 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심오한 고찰 때문이다. 우선 내용 자체는 생각보다 시시하게도, 서기전 188년에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 대한 찬양을 즉위 8년 뒤 서기전 196년에 비문으로 새긴 것이다.

엄청난 권세를 가지신 분, 이집트를 지키고 번영하게 하신 분, 신에게 독실한 마음을 가지신 분, 적을 이기시는 분,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시는 분.

 어린 왕에 대한 상당히 맹목적인 칭송을, 단지 그 파라오의 업적이 너무 훌륭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이유로 신들의 말을 쓰는 글자인 성체자, 문서를 쓰는 글인 속체자 그리고 이오니아인들의 글자(그리스어) 로 새겨 신전에 영원히 사시는 파라오의 조각상과 함께 비치해야 한다 는 것이 이 비문의 내용과 서로 다른 문자로 쓰인 이유의 전부이다.

 

 다시 로제타석이 갖는 의미의 본질로 돌아와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내용이 아닌, 인류에게 ‘언어란 무엇이었는가’ 에 대한 고찰이다. 로제타석의 해독이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세 가지 언어로 쓰인 세 판본이 서로 완전히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어로 쓰인 부분은 학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두 부분이 그리스어 부분과 완전히 같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성체자와 속체자에 대한 대조가 불가능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마치 ‘세 사람이 같은 영화를 보고 각자 요약한 것을 서로 다른 문자로 적은 느낌’ 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당시 학자들에겐 이러한 이집트의 문자가 영어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인지, 히브리어나 아라비아어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것인지, 중국어나 일본어처럼 위에서 아래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인지 그 읽음 방향의 시작조차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언어란 크게 말하기와 쓰기 그리고 읽기의 세 과정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복합체이다. 다만, 말하기보다 읽기와 쓰기가 더 어렵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모든 아기는 자연스레 말하기를 배우지만, 읽기와 쓰기를 자동적으로 배울 수는 없다. 인류의 조상들도 5만 년쯤 전에 말하기를 시작 했지만 그 소리를 무언가로 기록하는 방식은 고작 5천년 전에야 만들어졌다. 결과적으로 말하기는 자연발생적이지만 쓰기와 읽기는 고안되었어야 했고 이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쓰기가 없었다면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급속하게 어설픈 신화와 우화 수준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 인류학자 로런 아이슬리 -

인류의 존속 기간을 하루로 치면, 쓰기가 고안된 것은 23시 무렵일 것이다.                                     - 언어학자 존 머쿼터 -

아프리카에서 노인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 시인이자 역사가인 아마두 함파테 바 가 오랜 시간 그의 고국인 말리의 구전설화를 수집하며 -

 

 마찬가지로, 읽기 또한 쓰기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언어의 행위이다. 읽기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가 써야 한다. 말리의 역사가 아마두 함파테 바 가 말한 것처럼, 인류의 문명은 그 탄생에서부터 오랜 시간 ‘망각’ 이라는 신체적 한계와 끊임없이 싸워왔다. 그 패배의 대가로 수없이 많은 문화를 통째로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때론 치열하게 승리하여 결국 더 많은 것들을 ‘기록’이라는 형태로 지켜왔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누군가의 무엇을(우리는 이를 보통 ‘정보’라 부른다)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써, 쓰기와 읽기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위대한 성과인 것이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항상 ‘인류의 가장 소중한 지식은 종이에 적힌 글자로 전해져 왔다.’ 는 말씀으로 ‘기록된 언어’의 중요성과 이를 읽고 다시 쓸 줄 아는 언어적 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하신다. 어쩌면 무한한 미디어 매체와 플랫폼에서 쏟아지는 시청각적 자료가 넘쳐 나는 현대 사회에서, 구시대적인 정보 전달의 방식으로 취급받는 쓰기와 읽기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쓰기와 읽기의 본질은 정보 전달의 방식 중 가장 소모적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든 가장 고도화된 언어의 형태를 습득하며, 그 행위 자체가 촉발할 수 있는 무한한 지식의 발전과 사회/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등, 궁극적인 사고(思考)의 능력인 것이다. 요즘 꾸준히 대두되고 있는, 젊은 세대로부터 점차 이어지는 실질적 문맹 문제는 결국 언어의 본질적인 면을 어느 순간 놓쳤기 때문에 단순한 소통의 결여와 이해의 부족을 넘어서 개개인의 지식과 사회 전체의 문화력이 퇴보하는 것이다. 이미 보편화된 시청각 자료의 장점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주는 장점을 취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언어의 본질적 학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고력을 충분히 갖고 그에 따른 정보 전달에 능숙해야만 한다. 설령 먼 미래의 인류가 지금 우리의 역사를 ‘데이터 센터’라는 건물의 버려진 저장 장치를 복원하여 얻은 유튜브 영상이나, 한때 도시였던 지역의 공사 중 발굴한 태블릿에 남겨진 pdf 와 음성 녹음 파일을 통해 알게 되더라도, 우리가 가꿔 온 성숙한 지식과 문화는 어떠한 편견의 여지와 각색의 오류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언어의 형태로 지켜져야 한다.

 

 요즘의 내가 가장 많은 힘을 쏟고 있는 ‘연구’라는 행위에 있어서, 이러한 언어의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가 잘 읽고 쓸 줄 알아야 내가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더 잘 읽고 쓸 줄 알아야 상대방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꽤 됐다. 책과 논문을 읽고, 이를 종합하여 생각하고,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 행동을 기록하고, 잘 정돈하여 누군가와 나누고 다시 또 읽고. 결국 나 자신의 지식과 사고력이 한 단계씩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순수한 언어로부터 배운 복합적인 능력이었다.

 

 이 감상의 제목이기도 한 훈민정음 언해(訓民正音 諺解) 의 서문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위이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하게 할 따름이다’ 로 끝이 난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봐야 할 구절은 바로 중간에 있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다.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든 훈민정음의 진정한 언어적 본질은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거나 쉬이 익혀 쓰임이 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비로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펼 수 있도록

한 것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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