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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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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윤호
댓글 0건 조회 2,600회 작성일 24-03-1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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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 패트리샤 처칠랜드의 ‘양심’을 읽고 -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교 생활까지, 정해진 교육과정을 전부 이수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은 대부분 갖추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군대를 갔다오고 연구실에서 생활하며 내가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되었고, 더욱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정해진 사회 안에서 남을 배려하고 잘 융화되는 사회성과, 이에 기반이 되는 ‘도덕적 양심’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사회 속에서 착하고 나쁜 성격들은 태초에 정해져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나쁘게 행동하는 것이 알고보면,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의도치 않은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후,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게 해주는 우리 마음 속 ‘양심’이 밖에서 학습되는 것이라면, 이 개념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라고 말이다.

이러한 내 궁금증은 이 ’양심‘이라는 책에서 많이 답변하고 있었다. ‘양심’이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말해주며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현혹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의 주변 지인들은 사형 집행을 거부하고 탈옥할 것을 권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거절한다. 폴리스에서 합의된 약속으로 법이 제정되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적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위배한다면, 폴리스의 정의가 유지될 수 없을거라 하며 말이다. 소크라테스에겐 자신의 목숨보다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와 사회 정의라는 도덕적 가치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양심과 도덕이 대체 무엇이길래 목숨까지 바쳐 헌신하려 했던 것일까.

 

 성직자 마틴 루터는 성령이 우리의 양심에 도덕적 진리를 기록하며 성령이 주장하심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며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마틴 루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는 말이 언제나 최선의 조언일 수 있을까? 글쎄, 역사적 사례를 보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미국에서 노예제도의 존립 여부를 두고 편을 두고 갈라져 싸운 남북전쟁에서 양측은 모두 같은 종교와 같은 신을 믿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양심과 도덕의 기원을 찾는 여정은 신에게서 ‘인간 이성의 힘’으로 옮겨갔다. 철학자 칸트는, ‘도덕법칙은 인간의 본능적인 면에서 독립된, 순수한 이성이 발견하려고 추구한다’라고 말했다 한다. 진정한 도덕법칙은 그 어떤 사회나 문화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하며 그 규칙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지지하고 보증할 수 있는 경우여야만 한다.

 

 그러나 저자는 도덕성 판단에 있어 이성적으로 모순 없는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성을 기반으로 도덕성을 논한다는 공리주의는 어떨까? 이는 ‘공평성의 요건’을 지키며 최대 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주의이다. 즉, 효용과 행복을 계산함에 있어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번 돈을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어려움을 겪는 기아들에게 전부 기부해야 한다고 강제한다면, 대다수는 이 주장에 반대할 것이다. 나 역시도 억울한 감정이 들며 이 주장을 반대할 것 같다. 결국, 이 역시 감정과 직관이 끼어들게 되면서 절대적인 기준 확립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이 외에도 역사적으로도 도덕성이나 양심이 주관이나 본능에 휘둘리지 않을 우리 외부의 어떤 절대적인 존재나 이성으로부터 찾으려는 노력이 있어 왔지만, 그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도덕원리에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도덕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저자는 도덕성과 양심의 기원에 관해서 생물학적으로 접근한 흥미로운 관점을 소개하였다.

포유류는 파충류와 달리 따뜻한 피를 가진 내온성 동물이다. 포유류는 따뜻하게 유지되는 피 덕에 기온이 떨어지면 활동이 둔화되는 파충류와 달리 극한환경에서도 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온도가 급격히 낮아진 빙하기 지구에서 포유류가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따뜻한 피를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열량이 필요했고, 알에서 태어나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생존을 도모하는 파충류와 달리 포유류의 새끼에겐 부모의 보살핌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살핌은 옥시토신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부모-자식간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이것이 나아가 형제, 친척, 친구 등 사회적 행동의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점점 더 많은 수의 개체가 모여사는 데 동조하게 되고, 사회가 구성원의 생존에 중요한 요소가 되면 그 생물은 개인이 아닌 사회 단위를 기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사회성이, 호모 사피엔스들이 야생에서 살아남게 해준 ’협동‘이라는 행동의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말했다.

 

 다만, 인간은 사회 안에서 타인을 통해 얻는 생존의 이점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사회적 평판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의 뇌는 보상 시스템을 통해 어떤 행동이 타인에게 용인되고, 어떤 행동이 배척받는지를 학습해 예측모델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성’에 극도로 거부감을 보이며 처벌을 내리는 한편, 남을 잘 도와주는 이타적인 구성원에겐 좋은 사회적 평판을 주는 방식으로 그들의 내면에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내적인 양심, 도덕 규범이 이성의 개입 없이도 욕구를 학습하는 보상 시스템에 의해 충분히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규범과 행동들이 일단 학습되어 습관화가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 이 행동들은 그 자체로 보상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행동들은 이익을 취하려는 계산적인 이타성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한편, 감정적인 면과는 더욱 가깝게 결부되기 시작할 것이다. 남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으면 좋은 감정이 들고, 사회적으로 배제될 위기에 처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신이 내린 절대적인 기준이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가 다시 우리의 생물학적인 판단에 양심과 도덕성을 새겨 넣었으며, 그러한 규범이 우리의 뇌 속에서 내재화되어 ‘양심’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양심과 도덕법칙은 인간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몸에 묶여 존재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정체성과 분리된 ‘확실하고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나 ‘도덕적 원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양심과 도덕 법칙이 언제나 확실한 정답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덕적 양심이 생물학적 관습이나 습관 정도로 폄하될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양심과 도덕성은 우리가 우리이기에 할 수 있었던 몇십만 년에 걸친 치열한 생존적 고민과 진화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며 내용을 마무리한다.

 

 저자의 생각에 덧붙여, 나는 이 양심이 이 사회에 융화되기 위해 개개인이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고도 생각한다. 이에 난 오늘도 내 양심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연구실에 융화되고자 노력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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