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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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고전 문학은 두껍웠고, 지루했고, 생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고전 문학에 대한 흥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분명한 주장과 뚜렷한 근거가 있는 사회과학이나 정확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글이 더 이롭다 생각했고, 흥미를 돋우지 못하는 고전 문학은 나와는 맞지 않는 어색하고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요새 들어 고전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감상문을 작성하기 위해 다시 펼치기 시작한 한 두 권의 책들을 시작으로, 새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소설이란 어떤 철학을 여러 가지 이미지들로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좋은 소설에는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들로 변해 있다.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한 서평
고전에는 흰 그림의 퍼즐같은 매력이 존재한다.
인물이 걸치고 있는 옷, 햇빛의 온기, 바람의 촉감. 소설 속 모든 것에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고, 이것들을 한땀 한땀 읽어낼 때 비로소 문학의 재미가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의미는 작가만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인 나와 같이 부여하는 것. 고전이 쓰일 때 작가가 보내던 시대와 책을 읽고 있는 오늘 우리의 시대는 다르고, 둘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고전이 사랑받는 것은 사회과학이나 사실 전달 목적의 글에는 없는 작가와 독자가 같이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그날그날 별 의미 없는 주인공인 뫼르소의 생활을 묘사한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니, 어제였나?’
첫 글귀에서부터 나타나는 뫼르소의 이러한 언행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그는 엄마가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는다. 마리와 함께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동네에서 소문이 좋지 않는 레몽과도 말을 나누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그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레몽의 부탁으로 쓰지 않을 이유도 없어서 레몽의 복수 대상에게 편지를 써준다. 그의 이런 기이한 행동과 생각에 담긴 의미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1부는 뫼르소가 바닷가에서 아랍인을 죽이면서 끝난다.
2부에선 법정에서 그에 대한 재판이 이뤄진다. 그의 고요한 삶, 일상생활을 즉흥적으로 영위하며 별 의미 없이 행했던 행동들은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부터 지엄한 잣대로 평가되고 비난받는다. 법정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무심한 인물로,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후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덕적 원칙이 결여된 인물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체포된 뒤의 심문과 재판 과정을 관찰해보면 이 살인에는 피해자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많은 증인들이 실명으로 불려 나오지만 정작 피해자인 아랍인은 끝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다. 방청석에서마저도 아랍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순전히 백인들로 가득 차 있다. 살해당한 아랍인은 뫼르소가 체포되어 그가 감옥과 법정으로 보내지기 위한 ‘계기’일 뿐이다. 법정의 재판관, 검사, 변호사에게 피고인 뫼르소 마자 실질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법정은 ‘부조리’가 존재하는 일종의 ‘연극 무대’이며 등장 인물들 또한 ‘연극 무대’에 속한 가식적인 인물들. 공식적 사회의 연극적인 참모습은 이 ‘연극 무대’에 대조되어 표현된다.
뫼르소는 부조리한 인간이다. 그는 결코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해석하거나, 평가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주어진 것을 인간적인 언어로 치환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 같이 만드는 것일 뿐이다. 평준화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보는 인간이다.
세상에 산재하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 이들의 눈에는 뫼르소는 이해 가지 않는 사람이다.
뫼르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가 그렇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뫼르소의 행동에 의미와 동기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뫼르소의 살인이 어머니의 죽음에서부터 모두 예고된, 논리적인 범행이라 주장한다. 정작 뫼르소 본인에겐 어머니의 죽음에서 자신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것과 이후의 살인은 하등의 인과관계가 없을지라도.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놓여있다.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뫼르소에게 부속 사제가 찾아와 신을 믿으라고 종용하지만, 뫼르소는 소설 속에서 처음으로 격정적으로 폭발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럴듯하게 바꾸는, 마치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제를 거부한다. 그는 피하지 않고 단단한 마음으로 죽음을 대면한다.
죽음에 대한 확신. 희망이 없다는 확신. 부조리의 존재에 대한 확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뫼르소는 자유를 느낀다. 일관된 자세로 부조리에 반항한다.
이방인은 죽음과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삶이 하나의 밝은 점이라면,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다. 작가 알베르 카뮈는 본인을 ‘이방인’에 투영시켜 삶의 무용함과 허무함을 표현함과 동시에 이 앞에서의 반항을 말해준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은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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