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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노예들에게 - Encheirid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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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빈
댓글 0건 조회 2,706회 작성일 24-01-1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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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를 살아가는 노예들에게 - Encheiridion ”

- 에픽테토스 著, A.A. 롱 엮음 「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를 읽고 -

 

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이것은 감탄인가, 질문인가, 정치적 선언인가,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바람인가, 자율의 열망인가,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인가?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에서 생겨났다. 이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정치 이론이 아닌 개인의 행복과 자기 수양이었다. 스토아 학파의 시조인 제논(Zenon)이, 자유는 현명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통 사람들은 바보이자 노예이다 라고 말했듯 자유를 사회적 신분의 표지가 아닌 윤리적이고 심리적인 것에서 기인한 가치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 (Epiktētos) 로마 네로 황제 시절에 살았던 인물로, 스토아적 삶과 그 철학 전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노예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 때문인지 에픽테토스의 철학에 의한 자유는 법적 상태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기회도 아닌 ‘전적으로 자신이 욕구하고 결정하며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은 욕구하거나 결정하지 않기에 좌절이나 실패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정신적 태도’ 이다. 인간 자체를 재산으로 만들어 거래하고, 주인의 명령에 한 사람의 삶을 좌우했던 노예제의 당시를 반영하면 스토아학파의, 그리고 에픽테토스 철학의 자유가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 이유가 납득이 된다.

 

그런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그가 2세기 초 그리스 북서부의 도시 니코폴리스 (Nicopolis) 에 세운 학교의 학생인 루키우스 플라이바우스 아리아누스 (Lucius Flavianus Arrianus) 에 의해 후세에 전달되었다. 아리아누스가 에픽테토스의 강의를 듣고 기록한 결과물이 바로 『대화록 Discourses』 이고, 이 중 핵심적인 내용만을 골라 정리한 것이 『엥케이리디온 Encheiridion』 이다.

 

이 세계에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도 있고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도 있다. - 1

 

엥케이리디온의 1절은 그 뒤에 이어질 총 52개의 절에 대한 도입 역할을 확실히 함과 동시에 전체를 포괄하는 통찰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간단하고도 명확한 생각이, 요즘 참 어렵다. 가끔 몇 분, 몇 시간 그리고 며칠 전 일들을 돌아보면 나에게 달려있었던 것과 달려있지 않았던 것이 보이곤 한다. 애석하게도, 매번 그러한 깊은 생각의 순간은 일이 벌어지고 난 뒤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내가 그 일을 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깊게 생각했다면, 나에게 달려있던 일을 성공적으로 수확하고 달려있지 않았던 일은 후일을 위해 과감히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지 말고, 일어나게 되어있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무사할 것이다. - 2

 

원하는 결말만 쫓다 보면 열에 아홉은 늘 실망으로 끝이 난다. 순탄히 흐르던 물길에 바위를 던져 없어도 될 가뭄의 땅을 만들 듯, 바라던 욕심이 눈을 가려 원래 가야 할 길을 벗어나 돌부리에 치이고 가시밭에 찔리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어나게 되어있는 대로 라는 말은 어쩌면 나라는 주체를 잃고 끌려가듯 나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일어나게 되어있는 대로 일어난다는 신념을 갖고 구태여 여기저기 방황할 길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빗맞히기 위해 세운 과녁이 없듯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본성상 나쁜 것은 없다 – 21

 

고개를 들어 저 앞을 내다보면, 언제나 나의 과녁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내가 세워 두었다. 가늠자를 통해 아무리 한 가운데를 맞추려 해 보아도 가끔은 힘없이 고꾸라져 그 앞에 떨어지기도 하고, 저 옆에 있는 애먼 나무를 맞추기도 하고, 그나마 맞은 한 발은 중앙에서 한참 멀어진 곳에 이질적인 상흔(傷痕)처럼 남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것에게서 눈을 떼고, 언제 맞을지 모를 또 다른 과녁을 탐할 수는 없다. 수 없이 쏘아댔던 화살이 한참을 돌고 돌아 마침내 명중할지언정, 그 빗나간 모든 화살을 탓할 수는 없다. 내가 세운 과녁은 그 자리에 있고, 내가 쏜 화살은 적어도 그 과녁을 향해 시작했기에 이 모든 과정은 오로지 한 과녁만을 위한 피나는 노력이자 처절한 도전이다. 남에게는 단 한 발의 10점으로 보이더라도, 그 곁엔 수많은 0점이 있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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