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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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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호석
댓글 0건 조회 2,896회 작성일 24-02-1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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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소설이란 어떤 철학을 여러 가지 이미지들로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좋은 소설에는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들로 변해 있다.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한 서평-

 

주인공인 역사학자 로캉탱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지금은 부빌이라는 도시의 도서관에서, 18세기 프랑스 혁명기의 인물들의 전기를 정리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물가에서 물수 제비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는 순간, 갑자기 구역질 같은 것을 느끼고 손을 떼고 만다. 이 '손 안의 구역질'은 그 뒤에도 그를 자주 엄습한다. 그때마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생활은 무미건조한 나날들이었다. 낮에는 도서관에 다니면서 문헌을 탐독하고, 밤에는 카페의 마담과 타성적인 교섭을 가지며 단조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에게 기묘한 감각은 쉴 새 없이 일어난다. 그의 손이 닿거나 눈길만 주어도 일어나는 이상한 감각은 그의 몸을 떠날 줄 모른다. 그리고 강력한 증오감과 함께 ‘구토’를 동반한다. 이윽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마로니에 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드디어 구토증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것은 이유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존재물의 맛이란 것이었다. 마로니에라는 나무뿌리를 생각했을 때, 마로니에 나무뿌리는 그 마로니에 나무뿌리라는 말의 형체를 벗고, 모든 부위를 통해 그의 몸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구토’란 인간이나 사물의 언어에 의해 성립되는 의미나 본질을 박탈당하고 괴물처럼 흐물흐물한 무질서의 덩어리였다. 또는 무섭고 음탕한 벌거숭이의 덩어리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체계였고, 세계를 체험한 본질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그는 전기집필을 포기하고 부빌을 떠나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역사책을 탐색하지 않고 소설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집필하는 행위가 부조리와 대항하는 정당한 방법임을 알고 또 다시 새로운 희미한 희망을 품게 된다. 모든 존재에는 존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깊은 절망에 사로잡히나, 소설을 쓰는 것이 하나의 구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으며 소설은 끝난다.

 

 

카뮈와 사르트르

 

카뮈와 사르트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실존주의’라는 항목 아래 같이 묶여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카뮈의 「이방인」은 (지난 달에 감상문을 작성한 작품) 졸고 있는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1부에서 주인공인 뫼르소의 의식은 깨어나지 못해 수동적인 권태 의식 외에는 보이지 못 한다. 먹고, 잠자고, 담배를 피우고, 정욕을 느끼고, 어머니의 죽음도, 마리의 사랑도 그의 의식을 깨우지 못한다. 관습 속에 졸고 있는 그의 의식은 2부에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접하면서 깨어난다. 여기서 그는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인식하고,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통해 부조리를 거부하고, 그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사르트르의 「구토」 역시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깨달음을 통한 불안감 해소의 순간을 표현하고, 이 순간 소설 속에 꼭꼭 숨겨둔 그의 철학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나 인간조차도 어떤 본질이나 의미, 속성이 없는 ‘여분’의 존재이며 우연히 태어났고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우연성 속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물은 전혀 존재 이유를 가지지 않고, 또 존재의 의지조차 갖지 않은 채 단지 사실상 우연히 거기에 존재할 뿐이라는 것.

 

 

 

부빌 시의 시민들은 로캉탱처럼 ‘구토’를 ‘겪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일요일은 씁쓸한 맛을 그들의 입 안에 남겼고, 그들의 생각은 이미 월요일에 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다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돌연 생겨나는 마음속의 움직임이다.

 

인간은 자유를 타고났다. 이 무한한 자유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고, 선택을 하고, 이러한 선택들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인지하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빌 시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타고난 무한한 자유를 외면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역설적인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선택들 뒤 따라오는 막중한 책임감을 그들은 외면한 채, 사회가 정한 규칙 속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나 로캉탱은 다르다.

무한한 자유를 직시하지 않는 부빌 시의 시민들은 ‘구토’를 ‘겪지 않는다’. ‘구토’는 사회가 정한 규칙 속에서 부조리를 느끼고 의문을 갖는 존재들이 겪는 불안 현상이다. 존재의 ‘여분’을 깨닫고 세상 모든 것들의 우연성, 그리고 우연히 존재하는 존재들이 갖는 무한한 자유를 직시한 로캉탱은 더 이상 ‘구토’를 ‘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없다고.

그렇지만 존재하는 이유가 없으니 살 가치가 없다는 말 따위 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로캉탱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우연성 아래서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필연성, 그리고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나 역시 다시금 자기기만(自己欺瞞)에 빠져 있지 않은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경각심을 가져 본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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