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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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글리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주인공 패트릭은 예술사를 전공하신 어머니와 수학을 전공한 형(톰)을 가족으로 두고 있었다. 톰은 자연의 절대적인 신비함에 거스를 수 없는 경외감을 느껴 생물수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오랜 암 투병생활 끝에 젊은 나이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가족을 떠난보낸 상실감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던 동생 패트릭은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직에 지원한다. 패트릭은 하루 10시간씩 푸른색 근무복을 입고 가만히 서서 지나다니는 방문객들을 구경하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이따금씩 톰과의 추억을 회상한다.
평범한 한 인간이 겪는 인생의 타임라인이 있다. 학교, 직장, 결혼, 출산, 양육, 은퇴, 죽음 순으로 나열했을 때, 마음만 먹으면 중간은 누구나 생략할 수 있지만, 결국 인생의 긴 여정 끝에는 생명의 빛이 꺼지고 숨을 거두는 순간을 누구나 맞이하게 된다. 내게는 아직 거쳐가야할 인생의 숙제가 많이 남아서 죽음은 여전히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가끔은 눈을 감고 영원한 안식에 대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는 시기가 도래하면서 부모 세대는 은퇴를 맞이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간다. 강인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집안의 가장은 일을 그만둔 이후로 거짓말처럼 하루하루 낡아가고, 정적이고 나른한 일상에 녹아들면서 느려지고 둔해진다. 그러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과 딸들의 아들과 딸들을 볼 때면 잠시나마 생기가 돌다가도 작별의 시간이 오면 그대는 매번 아쉬움 마음을 노련하게 감춘다. 내가 아마 실제로 가까운 부모형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면, 삶의 공허함과 상실감에 며칠 방황 좀 하다가 나의 남은 삶에 대해 처음으로 진중히 고찰하게 될 것 같다. 패트릭에게 있어 톰은 인생의 큰 버팀목이었던 모양이다. 톰이 그렇게 떠나가고, 패트릭의 삶은 무너져내렸다.
M구역에서의 3개월이 끝나갈 무렵, 잠시 앉을 짬이 날 정도로 일찍 근무 지점에 도착했다. 나는 16세기 수피파의 더비시를 그린 그림 앞에 앉는다. 더비시는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로 수도사와 다소 비슷하다. 그림 새겨진 아랍어로 된 문구를 찬찬히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향한 비난과 원망스러움에 상당한 날이 서있다. 유한한 삶 속에서 몰아치는 고난과 역경이 서린 운명을 짊어지고 그저 선조들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하고 세속을 멀리하려 애쓰는 속과 달리, 반대로 외형적인 그림은 너무 절제되고 웅장해서 더비시의 애처로운 말투가 이질적이면서도 어딘가 적잖이 위로가 된다. 누구나 바삐 돌아가는 일상 속에 뚜렷한 번뇌가 있기 마련이다. 신이 내린 형벌이 축복으로 미화되어 표현되기까지 인간은 번뇌의 굴레에서 끊임없이 발버둥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세상에 남겨진 패트릭은 10년에 걸쳐 다시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보다 일찍 떠난 톰은 어쩌면 신이 내린 절대적인 운명의 벽을 초월하여 한편으로는 가장 먼저 자유롭고 행복한 영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예술작품이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에게 무언의 위로와 감동을 선사해줄 때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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