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페이지 정보

본문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 박해영 -
우리는 흔히 자신의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사람이라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사회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쉽게 판단한다. 그러나 정말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고 성공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며 살아갈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제목 그대로,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무가치함’이라는 감정을 여러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잘 나가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때에는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 – 作中 황동만
작품 초반, 황동만의 좌절은 누구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20년 동안 영화감독을 꿈꿔왔지만 아직 한 편의 영화도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그사이 주변의 선후배들은 하나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동만만이 홀로 제자리에 남겨진 듯한 상황에 놓인다.
동만은 무너지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선배의 영화를 면전에서 혹평하고, 동료의 시나리오를 무자비하게 비난한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에게 아직 영화를 평가할 능력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동만의 가치를 높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불안과 열등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후 동만은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마침내 자신의 영화를 완성한다. 그러나 그가 무가치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이유를 단순히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는 성과에서만 찾기는 어렵다. 더 중요한 변화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던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직접 마주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는 타인을 깎아내리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쪽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더욱 인상적인 점은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동만만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지만, 저마다 다른 형태의 불안과 무가치함에 시달리고 있다.
동만의 대학 선배이자 한때 그와 둘도 없는 사이였던 박경세 감독은 영화를 찍어본 사람과 찍어보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이야기하며 자신이 동만보다 앞서 있음을 과시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동만의 이야기를 각색한 첫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네 편의 영화가 모두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의심한다. 동만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시달린다면, 박경세는 자신의 성공이 그토록 무시해 온 동만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우연한 행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짓눌린다.
여러 드라마 감독에게 러브콜을 받는 유명 배우 노강식 역시 예외가 아니다.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그는 연기를 잘하는 후배가 언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것처럼 보이는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불안을 감추려 한다. 이미 성공한 사람조차 그 성공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동만과 박경세, 노강식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믿지 못한 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하려 한다. 동만은 자신보다 먼저 영화를 만든 사람을 깎아내리고, 박경세는 동만보다 자신이 앞서 있음을 과시하며, 노강식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후배를 밀어내려 한다. 자신의 가치가 성과와 서열에 달려 있다고 믿는 순간, 타인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위협하거나 확인하는 기준이 된다.
이처럼 등장 인물 모두를 통해 작품은 무가치함이 실패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감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흔들리고, 꿈을 이룬 사람은 자신의 성공이 우연이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흔들린다. 이미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흔들린다. 사람은 어느 위치에 있더라도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기준에 자신을 비추며 부족함을 발견하기 쉽다.
결국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실패 그 자체라기보다, 성공과 성과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인지도 모른다. 좋은 직업과 높은 지위, 많은 돈과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가치는 언제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더라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나타날 수 있으며, 과거의 성공이 현재의 공허함까지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이 뭐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성공, 그런 것 말고. 어떤 인간이 되겠다는 그런 목적.” – 作中 황진만
동만의 형 황진만은 한때 촉망받던 시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입양 보낸 뒤, 그는 매일 술을 마시며 살아간다. 그런 진만은 동만에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또한 동만의 시나리오를 봐주는 기획 PD 변은아에게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질문한다.
두 질문은 서로 다르게 들리지만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 무엇을 이룰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좋은 성적을 받고, 원하는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내가 곧바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고 나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목표를 이룬 자리에는 다시 공허함이 찾아올 수 있다.
목표가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라면, 목적은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목표보다 목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떠한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알고 있다면 삶의 순간들은 단순히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게 된다. 당장 눈에 띄는 성과가 없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든 과정이 삶의 목적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보며 나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명칭을 모두 제외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싶은가.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바쁜 일상에 치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한 하루가 반복되더라도,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누군가가 이뤄낸 성과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견뎌온 시간과 쉽게 드러나지 않는 노력까지 살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는 마음에서 비롯된 배려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따뜻함이 나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성과와 비교에서만 찾을수록 타인은 나보다 앞서 있거나, 내 자리를 위협하거나, 내가 이겼음을 증명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동만과 박경세, 노강식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그러했다. 반대로 사람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결과 너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타인을 깎아내리지 않고도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가치 있는 삶을 특별한 업적을 남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반드시 거대한 성공이나 뚜렷한 결과를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힘든 하루를 버텨낸 일, 쉽게 포기하지 않은 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일 역시 한 사람의 삶을 충분히 가치 있게 만든다. 누군가의 성과뿐 아니라 그가 견뎌온 과정까지 알아보는 태도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꿀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절망적인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사람조차 나와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만 흔들리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가치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 속에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눈에 띄는 업적을 가진 사람보다 힘든 순간에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느끼는 무가치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헐뜯는 대신,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향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이 흔들릴 때 그 사람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가치를 먼저 알아봐 주는 사람. 그것이 이 작품을 통해 발견한, 내가 닮고 싶은 삶의 태도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