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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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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건희
댓글 0건 조회 258회 작성일 26-07-1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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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체는 스스로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그릇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틈이 생기면 곧바로 흘러나간다. 단단한 벽이나 용기를 세워 움직임을 잠시 제한할 수는 있지만, 그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액체는 다시 정해진 방향 없이 퍼져 나간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현대』에서 오늘날의 사회를 이러한 액체의 성질에 비유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는 제도와 가치, 관계와 정체성이 오랫동안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며 하나의 상태가 완성되기도 전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고 사람들의 삶은 어떤 최종적인 형태에 도달하기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 놓인다고 말한다. 바우만이 바라본 현대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새롭게 형성되는 ‘되어감’의 상태에 가깝다.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사회 역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당시의 변화에는 언젠가 더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며 완전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근대인에게 현대화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은 분명하지만 액체현대의 변화에는 최종 목적지가 없다. 변화는 더 나은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일상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근대의 미완성이 완성을 향한 과도기였다면, 액체현대의 미완성은 그 자체로 지속되는 하나의 상태인 셈이다.

 

 근대사회에서 자유는 주로 국가와 사회, 공동체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문제로 이해되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묘사하는 미래사회처럼, 거대한 조직이 개인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상황은 자유를 추구하던 사람들에게 대표적인 공포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에도 자유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바우만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공적 권력과 공적 영역이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이 실질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사적 삶을 보호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공적 제도와 규칙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체현대에서 약화되는 것은 사적 영역보다 오히려 공적 영역이다. 사회 전체가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들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과거에는 개인적인 일로 여겨졌던 경험과 감정이 공적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2010년대 이후 하나의 대중문화 장르로 자리 잡은 관찰 예능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사생활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연예인의 식사, 가족관계, 주거 공간과 일상이 방송을 통해 공개되고, 개인의 생활 자체가 대중의 관심과 소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타인의 일상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과 함께 명확한 삶의 기준이 사라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선택과 생활방식을 살펴보며 자신이 따라갈 만한 모범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를 통해 잠시 안도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기준과 대상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불안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고 이러한 행위는 반복될수록 개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며 다시 비교와 관찰에 의존하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바우만은 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소비의 문제에 주목한다. 소비는 여러 사람이 함께 수행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만족과 감각을 경험하는 행위다. 소비자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면서 자신만의 경험을 얻지만, 그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이전되거나 공유될 수 없다. 그 결과 소비사회 속 개인은 공동의 목적을 가진 생산자나 시민이라기보다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소비자로 존재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소비를 통해 얻은 만족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장 가장 새롭고 우수한 상품을 구입하더라도 곧 더 발전된 제품과 새로운 생활방식이 등장하는데 이미 가진 것은 빠르게 낡은 것으로 인식되고, 개인은 새로운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생산구조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액체현대의 성격이 결합하면서 소비자의 욕망은 종결될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비는 필요를 충족하는 행위를 넘어 불안을 관리하는 방식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이나 현재의 삶이 충분하지 않다는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것을 구매하지만 소비가 제공하는 안도감은 일시적이며, 만족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불안이 생긴다. 결국 개인은 욕망하고 소비하며 다시 불안해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장기적인 계획이나 지속적인 관계보다 당장의 선택과 만족이 중요해지면서,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전망은 약해지고 현재의 순간만이 강조된다.

 

 그렇다면 완성된 기준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정답도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미 성공한 사람의 삶을 모방하거나 사회가 제시하는 본보기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의 방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삶의 방향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액체현대의 문제는 정답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정답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삶의 방향을 대신 정해주거나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보증해줄 존재가 없다는 사실은 개인에게 큰 부담을 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조건을 인식하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향을 결정할 여지도 생기기 때문이다. 아직 액체현대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를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액체현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안정한 세계를 단번에 고체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흔들림과 변화가 삶의 조건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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