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너머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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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의 진리
강철의 연금술사 &
연금술 (요시무라 마사카즈) 를 읽고
“나는 진리. 나는 세상. 나는 우주. 나는 신. 그리고… 너 자신이다.”
『강철의 연금술사』를 읽으며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은 등가교환도, 현자의 돌도 아니었다. 오히려 진리의 문 앞에서 스스로를 '진리이자 세상이자 우주이며, 신이고, 동시에 너 자신'이라고 말하는 존재였다. 처음에는 절대적인 존재를 드러내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을 끝까지 읽고 실제 연금술의 역사와 그 시대의 사상을 함께 살펴본 뒤에는 이 한 문장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흔히 연금술을 납을 금으로 바꾸는 기술 정도로 기억한다. 그러나 연금술이 성행했던 중세 말과 르네상스 시대의 연금술은 단순한 화학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철학이었고, 신이 창조한 질서를 탐구하려는 학문이었다. 당시에는 신과 자연, 인간이 지금처럼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고, 세계는 신의 질서를 담고 있으며, 인간은 그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인간은 작은 우주이고, 우주는 큰 인간이라는 사상 역시 이러한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연금술이 추구했던 것은 황금 자체가 아니었다. 황금은 완전함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연금술사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세계를 이루는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신이 만든 질서를 이해하는 일은 곧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었고,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작품 속 진리가 자신을 '세상', '우주', '신', 그리고 '너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대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압축한 표현처럼 보인다.
작품의 시작에서 에드워드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인체 연성을 통해 죽음을 되돌리려 했다. 동생 알폰스와 함께 인간 연성을 시도했지만, 연성된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진리의 문으로 끌려갔고, 알폰스는 육체를, 에드워드는 왼쪽 다리를 잃는다. 에드워드는 다시 오른팔을 대가로 동생의 영혼을 갑옷에 정착시킨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연성 직후 잠시 움직였던 ‘그것’ 안에는 어머니의 혼이 아니라 알폰스의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죽은 사람의 혼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진리의 문을 통과한 대가로 에드워드는 연성진 없이도 연금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능력은 보상이 아니라 통행료를 지불한 흔적에 가깝다. 그는 잃어버린 동생의 몸을 되찾기 위해 현자의 돌을 찾고, 더 큰 진리를 좇으며 여행을 이어간다. 처음에는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해결책 역시 가까워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여정은 그 믿음을 조금씩 수정한다. 인간 연성은 죽음을 되돌리지 못했고, 현자의 돌은 수많은 생명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가능한 방법이 언제나 선택해도 되는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진리를 아는 것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고,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역시 같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에드워드의 여정은 더 많은 진리를 얻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변해 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날 무렵 그는 모든 진리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진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에 가까워 보인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하나의 대비를 만들어 낸다.
에드워드가 진리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 가는 동안, 호문쿨루스는 끝까지 그 한계를 부정한다. 그는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수백만 명의 사람을 현자의 돌의 재료로 삼아 진리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실제 연금술이 완전성을 추구했던 역사와 맞닿아 있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연금술은 신이 만든 질서를 이해하려는 학문이었지만, 그 질서를 소유하려는 순간 탐구는 오만으로 바뀐다. 호문쿨루스는 그 경계를 끝내 넘어서려 했고, 에드워드는 그 경계 앞에서 멈춰 선다.
그래서 마지막 선택이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에드워드는 알폰스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진리의 문을 대가로 내놓는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진리를 향해 걸어온 인물이 마지막에는 진리로 향하는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연금술을 잃는 결말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내려놓은 것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세상은 이해할 가치가 있고, 세계에는 분명 질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내려놓는다. 진리를 향해 걸어가는 것과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작품을 관통하는 문장이 조금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나는 진리. 나는 세상. 나는 우주. 나는 신. 그리고… 너 자신이다.”
처음에는 신과 진리가 인간 밖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대상으로 읽혔다. 그러나 연금술이 성행했던 시대의 세계관을 떠올려 보면, 신과 세계, 인간은 서로 단절된 존재가 아니었다. 신은 세계를 만들었고, 인간은 그 세계의 일부였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리는 마지막에 '너 자신'이라는 말에 이른다.
에드워드가 마지막에 포기한 것은 진리의 문이었다. 그러나 문을 잃었다고 해서 진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진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고, 인간은 여전히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 다만 모든 진리가 문 하나를 통과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첫머리에서 진리는 스스로를 '세상', '우주', '신', 그리고 '너 자신'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그 문장을 읽으면, 진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이 평생 이해하고자 하는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말처럼 보인다.
그래서 에드워드의 마지막 선택은 진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다가가는 방식을 바꾼 순간이었다. 문을 통과하는 대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작품이 말하는 진리는 세상의 모든 원리를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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