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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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지음
여느 때처럼 평범한 여름 밤, 촘촘히 쏟아 내리는 빗길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며 연구실에 대충 굴러다니던 아무 우산을 쓰고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밤의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양말이 서서히 젖어 들어갔지만, 곧 집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차가 오나 잠시 멈춰서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완만한 오르막길 경사 위 어둠 속에서 홀로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그 조명 아래로 아스팔트 표면이 아득히 보였다. 아까 대낮에도 같은 길을 걸어왔는데, 그땐 햇볕이 쨍하게 내려 쬐어 선명했던 아스팔트 표면이 지금은 무참히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제멋대로 튕겨져 나가며 무대 위 연출된 장면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몽환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을 다 건널 적에 이번에는 비에 젖은 흙 냄새가 소리 없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그 냄새는 점점 강해지더니 서서히 진동을 했다. 그러더니 어느덧 비 떨어지는 소리가 멀어지고, 어은 동산의 적막함 가운데 풀벌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늘 같은 자리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안보였고, 고양이 밥그릇에는 빗방울이 가득 고여 찰랑거렸다. 주말이라 다들 고향에 갔는지 듬성듬성한 주차장을 지나 세월에 녹슨 철문을 따고 드디어 내 방에 도착했다.
이 짧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의 몸은 무사히 집에 왔지만, 마음과 생각은 어느 순간에 정체되어 그곳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더 머물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과거 일에 대한 후회일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출처가 불명확한 불안들이 아직 내 안에 맴돌며 해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내 손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을까
벗을 수 없어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알 수 없겠지 이 모든 순서와 이유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삶이 아름다운 기억들로만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큰 욕심이지만,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망각이라는 선물을 잘 활용한다면 최소한 불행했던 과거의 아픔들은 소각해낼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찾아오고 내게 도전을 걸 것이다. 젊은 날의 시간과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배움에 많이 투자하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아직까지 체감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과 남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걱정이 드는 요즘, 이어지는 시의 구절들이 여름날 밤 나에게 작은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왔을 것이다
불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불행을 불러내는 주술사처럼
뭐든 미리 불태우려고
미리 아프려고
내 마음이 던진 공을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그래도 가끔은
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불타는 공이 날아왔다는 것은
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글러브를 단단히 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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