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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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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대현
댓글 0건 조회 298회 작성일 26-07-1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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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은 안개처럼 대지를 뒤덮은 '망각'을 배경으로 한다. 사람들은 최근의 기억은 물론 오래된 과거조차 온전히 떠올리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주인공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오래전 떠나보낸 아들을 찾아 길을 나서면서, 정작 자신들이 안개 속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여정을 시작한다.

여정 중 만나는 인물들의 태도는 서로 엇갈린다. 색슨족 전사 위스탄은 안개의 근원인 용 케리그를 처치하려 하지만,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은 오히려 안개를 지키려 한다. 그에게 안개는 재앙이 아니라, 브리튼족과 색슨족 사이의 학살과 배신이 되살아나 다시 피의 복수극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작품은 망각이 공동체의 평화를 지탱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로 질문을 확장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안개는 결코 선택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전쟁의 참혹함과 증오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쌓아온 사랑과 아들과의 추억, 그리고 부부 사이의 상처와 화해의 순간들까지 함께 지워버린다. 액슬은 조각난 기억을 되찾으며 자신이 비어트리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마주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두 사람이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다시 확인시켜준다. 아픔과 사랑은 같은 안개 속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깊이 공감한 부분이다. 기억을 잊는다는 것, 추억을 잊는다는 것, 아픔을 잊는다는 것, 어떤 것이든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안다. 흥미롭게도 내 연구 분야인 NAND flash 역시 저장된 데이터를 지우는 일이 어렵다. 이 기술적 이슈가 내 연구 주제와 직결되어 있기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기술적인 설명은 잠시 미뤄두고, 저장된 기억(데이터)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과 낸드 플래시는 닮아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와 낸드 플래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을 온전히 지우지 못해 고통받는 존재다.

 

사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숙명이다. 인간이든 메모리 반도체 소자든, 고도의 연산과 사고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쉽게 손실되어서는 안 된다. 소설 속 가웨인 경이 안개를 지키려 했던 이유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데이터, 즉 기억이 함부로 손실되면 그 위에 쌓아 올린 관계와 질서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위스탄은 결국 케리그를 처치하고, 안개는 걷히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리고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억눌러왔던 모든 기억,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다시 짊어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고도로 발전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아픈 기억까지도 함께 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과 기술 모두에게 공통된 숙명인 듯하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에 비어트리스가 뱃사공에게 강 건너편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이 소설 전체의 주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뱃사공은 관습에 따라 부부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했는지를 개별적으로 확인하려 하고, 액슬은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이 함께해온 모든 기억, 기쁨과 상처를 포함한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 순간 선택적으로 좋은 기억만 편집해서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안타깝게도 신과 자연의 물리 법칙은 특정 데이터만 선택적으로 지우는 재주를 우리와 낸드에게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지우려 애쓰기보단 새로운 기억(데이터)을 더 담아 다음 상태(state)로 넘어가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소년 에드윈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우리를 잊지 말고, 어릴 적 우리와 나눈 우정을 잊지 말아 다오."

위 대사는 결국 이 소설이 도달한 결론과 같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두려워하기보다, 그것을 다음 세대와 다음 순간으로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존재가 나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낸드가 새로운 쓰기 동작을 통해 다음 상태로 넘어가듯, 우리 역시 아픈 기억을 지우는 대신 그 위에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잊고 싶은걸 억지로 잊으려 하지말자, 두려워 하지 말자, 새로이 쌓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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