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Nachmittag eines Schriftstellers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동빈
댓글 0건 조회 2,478회 작성일 23-10-04 02:52

본문

“ Nachmittag eines Schriftstellers ”

- 페터 한트케 著 「어느 작가의 오후」 를 읽고 -


 매년 10월 초가 되면,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에서 인류의 생리의학, 물리, 화학 그리고 평화와 문학(경제학상은 스웨덴 중앙은행이 수여하는, 가장 뒤에 만들어진 노벨 기념상과 같기에 제외하였다)에 공헌한 인물들에게 노벨상을 수여한다. 생리의학, 물리 그리고 화학상은 첨단 공학 (반도체, AI 등) 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하는 요즘, 기초과학에 대한 홀대로 인해 (적어도 우리나라는) 점차 그 관심을 잃어가는 듯 하지만 그나마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이름이 뒤에 있기에 아직까지는 그 명성을 지켜주고 있다. 반면 평화상과 문학상은 매년 국제 사회의 큰 이슈와 관심사에 따라 그 수상자가 정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수상자가 정해졌기에 다시금 국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노벨상에 대한 정론(正論)은 그만 차치하고, 서늘한 북풍에 낙엽이 사그라지는 가을날이 되면 나의 소일거리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특정 업적을 치하하여 그 업적에 기여한 인물에게 주는 다른 상들과는 달리, 문학상은 –감사하게도- 특정 ‘작품’이 아니라 그 ‘작가’ 자체에 수여된다. 이러한 문학상의 기조는 –감사하게도- 수상자의 대표작 혹은 특정 작품에만 감상평이 머무르지 않고, 그의 다양한 작품을 직접 찾아 읽어가며 그가 구축해온 세계에 대한 온전한 심미(審美)를 느낄 수 있다. 수상자에 대한 이런 문학적 탐닉의 자유는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데 그 이유는 명확하다. 수년 전 역사상 최악의 뮤지컬 영화라는 감상을 남겼던 ‘라라랜드(La La land)’ 가 그 해 다수의 고명한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었다는 이유만으로 매번 대화 속에서 ‘그 영화 좋았지’ 라는 가면을 쓴 이후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매번 쓴 웃음이 나온다.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의 「어느 작가의 오후 (Nachmittag eines Schriftstellers)」 는, 노벨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노벨상을 수상하기에 마땅하다고 여기는 그의 ‘작품’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작품에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언어, 그리고 언어에 의한 언어, 또 언어에 의한 언어의 언어만 있을 뿐이다. 작가로서 문학에 뛰어든 순간부터 그는 문학의 순수성을 지향했고 문학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에 늘 불만을 가졌다. 역자(譯者)의 말을 빌리면 이 작품은 줄거리가 없고 표현이 생경하며 앞뒤의 연결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을 여러 번 곱씹어 보면 이상하게 작가의 이야기가 이해되고 그 표현의 (이해하기 힘든) 참신함이 머리속 한 구석을 찌르는 듯 다가온다.


 그는 침실의 창을 열었다. 정원을 등지고 있는 그곳은 암석으로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세월이 흘러 연필을 깎은 부스러기가 많이 쌓이면 자신이 저 아래에 떨어졌을 때 충격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다>와 <시작한다>는 그에게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실이라 할 수 없는 거의 같은 개념이었다. 그리고 <첫눈>은 초봄의 첫 노랑나비, 5월의 첫 뻐꾸기 소리, 여름의 첫 잠수, 가을날 베어 먹는 첫 사과와 같은 것이었다. 이렇듯, 세월이 흐를수록 사건 자체보다 기다림이 더 위력적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옷깃에 살짝 스치기만 한 눈송이를 벌써 이마 한가운데서 느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페터 한트케가 설정한 작가(Schriftstellers)의 오후, 하루의 집필을 마치고 그저 집을 나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온 그 오후에 대한 사실적이고 망상적인 서술은,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문학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고 그 속에 교묘하게 페터 한트케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을 투영한다. 어쩌면 이 작가처럼 순수하고 명확한 근간이 되는 언어로써 문학의 가치에 도달하듯이,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복잡한 계산이나 섣부른 기교 없이 그저 기본을 지켜가는 것이 결국 그 일을 달성하는 정도(正道)가 이지 않겠나 하는 감상이 가슴 전체에 스며든다. 


 선들을 대신하여 끼적거려 쓴 검은 글자들이 관찰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달했다. 펜을 눌러 쓴 것, 잉크가 튄 얼룩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격렬한 긴장. 종이는 늘 새롭게, 번번이, 헛되이 공격당하는 것 같았다.                                                                                          


 하루 뒤 저녁이면 올해의 수상자가 밝혀진다. 과연 그의 작품들은 또 어떤 감탄을 일깨울까. 가끔 문학의 본질을 잃고 난무하는 글들을 보면, 종이는 늘 새롭게, 번번이, 헛되이 공격당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가 눌러 쓴 그 글자들이 적어도 한 사람에게 깊은 감상을 남길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적인 상(賞)의 가치는 독자 개개인이 품은 상(想)들을 모아 성립될 수 있다는 짤막한 고견을 가져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