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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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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훈
댓글 0건 조회 2,497회 작성일 23-09-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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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위해 산다  

- 김여환의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을 읽고 -




  내게는 2명의 고모 할머니들이 있다. 우리 집안에서는 나의 친 할머니가 어릴적부터 할아버지와 같이 지내시면서 고모 할머니들을 챙겨주셨기 때문에, 당신들끼리의 사이가 퍽 좋은 편이다. 그 2명의 고모할머니들 중 나이가 더 많은, 즉 언니인 분의 남편을 우리는 큰 고모할아버지라 불렀는데 명절때마다 고모할머님과 함께 자주 우리집에 찾아오셔서 내게는 굉장히 익숙한 분이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날, 내게는 어려서부터 삶의 일부분이었던 고모 할아버지께서 암 진단을 받으셨다.


  사실 고모할아버지 께서는 나와는 촌 수 차이가 좀 나기도 하고, 명절때마다 집에 찾아오시기는 하셨지만 명절이 1년에 자주있는것도 아닌지라 그 존재가 익숙하긴 했지만 나와 그리 가까운 관계인 분은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다만, 명절때마다 찾아오셔서 큰 체격에 걸맞는 호탕한 목소리로 친척분들과 함께 얘기하시다가 나에게 가끔씩 용돈을 쥐어주시곤 하셔서 내 마음속에는 가깝지는 않지만, 긍정적인 인상을 주던 분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고모할아버지께서 폐암 진단을 받으셨다. 자주 뵈었던 분이기도 하고, 집안끼리의 관계도 가까웠기 때문에 나도 할머니와 부모님과 함께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병원에 가서 보게된 고모할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평소의 큰 체격과 호탕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피골이 상접한 깡마른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고모할아버지. 항상 우리 할머니와 술을 마시며 밝게 웃으셨던 고모할머니의 피폐해진 모습. 그리고 그분들 주위에서 눈물짓고 있던 친척분들. 나에게는, 인생 처음으로 죽음이란 단어를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고모할아버지는 결국, 그 해를 견디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죽음이란 단어는, 당시 어렸던 나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였다. 나에게는 찾아올리가 없고, 설령 온다 해도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그러나, 위의 사건을 계기로 죽음이란 단어는 나에게 한층 가깝게 다가오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는 시간도 늘어나게 되었다. 죽으면 나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죽은 이후의 세계란 정말 있는 것일까?? 죽음이란 정말 커다란 고통속에서 찾아오는 것인가?? 많은 고민을 해봤지만, 내가 직접 경험해보기도 어렵고, 이미 경험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알려 줄 수가 없으니, 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죽음이 갖고 있던 무섭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조금씩 줄어들고, 죽음은 인생에서 한번은 꼭 겪어야하는, 삶의 마침표와 같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을 피할수 없다면, 그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의사인 작가 김여환이 호스피스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그 이야기들을 엮어 낸 책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에는 여러 종류의 죽음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죽음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고 평온히 눈을 감는다. 누군가는, 끝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루어 질 수 없는 희망에 목을 매고 고통속에서 죽어간다. 내게는 아직 가깝지는 않은 미래의 일이겠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내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나에게 더 구체적인, 죽음에 관한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읽은 후에도 공통적으로 내가 죽음에 대해 갖고있는 생각은, 이런 말을 하면 젊은 너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나는 죽는것이 별로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입자들이 우연찮게 모여서 내가 된것은 이미 하나의 기적이고, 나라는 존재가 죽어서 사라진다 해도 다시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일 뿐 무서운 일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다. 하지만, 내 삶이 후회라는 감정과 함께 죽음으로 끝맺어지는 것은 두렵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하는 후회라니. 죽는 순간에 후회하는 일들은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으니, 그 일을 겪게되는 것을 상상하면 등골이 서늘하다. 결국 나는,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 보다는, 앞으로의 인생이 의미없어져 죽음의 순간 후회라는 감정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 더 두렵다. 이런 생각들을 갖게 된 이후, 내 삶의 목표는 '행복하게 살기' 에서 '죽는 순간에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고 만족하며 눈을 감을 수 있게 살기' 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후회속에 몸부림치며 죽고싶지 않다. 삶을 돌아보았을때, '이정도면 잘 살았지' 라며 만족하며 죽기를 바란다. 아직 짧은 삶이지만, 내 삶을 돌아보았을때 후회가 남지 않는 일에는 항상 고통이 동반되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때 그 좋아하던 게임을 줄여가며 시험 공부를 했던 기억. 좋은 대학교에 가겠다는 목표로 1년 내내 재수학원에 틀어박혀 수업에 집중하였던 기억. 그리고 귀찮은 몸을 이끌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해 좋은 몸을 갖게 되었던 기억. 좋게 말해도 힘들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기억들이지만, 돌이켜 보았을때 그 일들을 마친 이후에는 만족감과 성취감, 그리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던 당시의 치열했던 감정들의 편린이 남아있을 뿐 후회라는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대로, 열심히 놀았던 시절의 기억이 즐거움으로 남아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 조금 더 다른것에 노력했으면 지금 내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일이 끝난 이후에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다만, 죽음의 순간 삶을 돌아보며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인생의 끝에서 삶을 돌아보며 '이정도면 잘 살았지' 라고 천천히 곱씹으며 편안하게 여정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지금의 당장은 힘들수도 있는 순간들이,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내가 편안한 여정을 떠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으로 믿으며. 그렇기에 나는, 죽음을 위해, 죽음의 순간을 위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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