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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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으로부터 받은 만큼 그것을 동일하게 되돌려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맺어감에 있어 어느 정도의 불균형을 감내하고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관계 속에서 완벽한 상호작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마음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한 마음을 받는 것은 무진한 사랑이기에 하나의 자연의 섭리인 것 마냥 당연시 여겼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 또한 인간관계의 일종이기에 기울어진 서로의 불균형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영원히 불가해할 것 같던 가족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질 수 있다. 그리고 주고받는 (부모와 자식) 관계뿐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식들 간에서도 불균형은 존재할 수 있음을 <마음의 부력>에서 전달하고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관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부채감을 인지해야만 마음의 무게 추를 바로잡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듯하다.
“성식이는 대학원도 보냈잖아요, 라고 하는 그 애 목소리가 자꾸 들린다.
아니, 그 애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그런 말을 할 애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걸 어떻게 하냐.”
작중 주인공인 성식은 한 부모 가족이던 그의 가족체계가 감당해야 하던 경제적 위기 속에서 성식의 형인 성준을 대신하여 어머니의 뒷바라지를 받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분명 악의는 없었겠지만 마음 아프게도 선택 받지 못한 성준에 대해 어머니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되며, 덜 아픈 손가락 (성식)에 더 많을 사랑을 주거나 사랑의 재화를 쏟은 것에 대해 끝없는 자기 검열과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지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혜택을 더 받은, 더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덜 받은, 덜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을 향해 갖게 되는 마음의 부담감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이 사랑으로 야기된 죄의 굴레는 선택 받은 사람 (성식)에게도 확장이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성식은 선택을 받은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끼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낄수록 자신에 대한 혐오와 어머니로부터 편애를 받았다는 기억에 성준에 대한 마음의 빚인 정신적인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고결하고 아름답다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가 생활하는 중력 만큼이나 견고하다. 그러나 그 중력에 상응하는 반대급부의 힘인 부력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사랑의 이면이 빚어낸 참상이 얼마나 무력함을 주는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성준이냐?”
“...네, 성준이에요. 별일 없지요? 찾아뵌다 하면서도 시간을 못 내네요”
두 아들에게 해줘야 했어야 했지만, 현실의 어려움으로 해주지 못한 채, 큰 아들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어머니의 가슴에는 평생 죄책감이 남아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짙어지는 성준에 대한 어머니의 회한과 죄책감을 묽게하기 위해서 일까, 혹은 떨쳐버리려 해도 중력을 거슬러 심연의 세계에서 현실의 표면에 올라오는 사랑의 이면에 자리한 성식, 나 자신의 부채감을 극복하기 위해 직면하는 것일까, 성식은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에서 생전 헷갈려하시지 않던 내 목소리를 형으로 착각하는 어머니에게 형(성준)인 것과 같이 맞장구를 친다. 인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채감이라는 그물을 스스로 걷어내기 위한 그의 행동으로 하여금 수면에 올라온 죄책감을 극복해 다시금 무게의 추가 다시 자리 잡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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