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의 소설 -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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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마음 - chatGPT에 관한 단상들.
아라의 소설 – 정세랑
이규섭
최근 chatGPT가 화제가 되면서 끝물인가 싶었던 AI 시장에 활기가 돌고 있다. ChatGPT는 채팅 방식을 지원하는 대화형 인공지능 정보 제공 서비스로, 두 가지 서비스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나는 채팅 서비스라는 측면이다. 우리 세대는 머신러닝이 부흥하기 이전, 미리 프로그램된 적절한 대답을 되돌려주던 ‘심심이’라는 채팅 서비스를 기억하고 있다. 엉터리 대답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음에도, 아직도 회자될 정도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질문에 대답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서비스 자체에 대중이 얼마나 큰 흥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다. 머신러닝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수요에 대한 도전은 여전히 계속 되었고, 최근에도 비록 그 화제의 내용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도 ‘이루다’ 서비스를 필두로 여러 챗봇 서비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chatGPT는 ‘구글의 대항마’와 같이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고 각종미디어에 퍼져나가고 있다. 이는 chatGPT가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챗봇이 아니라, 분명 정보 제공서비스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chatGPT는 챗봇의 방식으로 구글 검색의 수요를 만족시킨다. chatGPT는 알아서 사용자의 요청을 1) 언어의 형태로 받아들여 이해하고, 그에 맞는 2) 정보를 찾아 3)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여 우리에게 제공한다. 단순히 정보를 찾아서 가장 적절한 순으로 추천하는 방식으로 제공했던 기존 포털 서비스에 비하여 보다 능동적인 형태의 서비스로 진화한 것이다. 정보의 독점과 불균형 시대에서 정보의 바다로 넘어오면서 적절한 정보를 찾아주고 추천해 주는 것으로도 충분했던 시절이었다. 이제 정보가 너무나도 많아지고 고도화되어 어떻게 정보를 정리하고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해 진 상황에서 사용자의 요구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적절하게 가공하는 추가적인 수요에 대응 할 수 있는 기술은 분명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아직도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의 정의는 모호하다. 학계에서도 이를 명확히 구분해서 약인공지능/강인공지능/초인공지능 따위로 분류해서 표현하려고 하나 이들 역시 확실하게 합의에 이른 정의가 있지는 않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대중이 기대하는 인공지능은 원하는 일을 ‘적당히 알아서 잘’ 해주는 도구라는 아주 모호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띈다.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라는 신조어는 참된 리더라면 결코 뱉어서는 안되는 말이지만, 요즘도 사람들이 수시로 뱉게 되기 때문에 탄생한 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수요는 근미래에도 쉬이 구체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대화를 통해 답을 유도해 나갈 수 있는 대화형 서비스인 chatGPT는 이런 추상적인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뚜렷한 강점을 가진 사업 아이템이었음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ChatGPT 활용기
ChatGPT를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이트에 접속해서, 회원가입 후, 입력창에 원하는 질문을 입력하면 된다. 검색에도 더 적절한 방식이 있듯, 완벽치 않은 chatGPT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질문을 잘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질문을 이어서 여러 번 할 수 있기에 답변을 보고 대화를 통해 질문 수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키워드 선정에 심혈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별도의 검색능력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답변이 이상하다면 어디가 이상한지 말하면서 수정된 답안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대화형 방식에서 비롯된 뛰어난 응답성은 chatGPT의 강점 중 하나다.
chatGPT는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충분한 데이터가 모여야 그 패턴을 통해 답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엉터리로 학습을 시켜 둔 경우나 잘못된 정보가 만연한 사례에 대해서 chatGPT가 허무맹랑한 답을 하거나, 완전히 틀린 대답을 그럴싸하게 진실인냥 대답하는 황당한 예시들을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학부수준의 지식만 해도 보편화되고 전세계에 확산되어 있는 양질의 정보다. 이러한 수준의 정보는 chatGPT가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전문성이 있는 지식들도 어느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들은 그 포괄적인 지식에 대해 쉽게 대응한다. 우리가 찾아서 배울 수 있는 수준의 전공지식에 있어 chatGPT는 충분히 전문가일 수 있다.
chatGPT는 어느 수준에서 까지 전문성을 보일 수 있을지 내 전공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다른 보편적인 지식들처럼 chatGPT는 강유전체 소자의 역사와 현재 동향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잘 엮어 설명한다. 다만 최신 동향의 경우 그 방향성은 그럴듯하게 언급하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기술적 설명은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를테면 FeFET을 뉴로모픽의 어떤 분야에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예시는 줄줄이 설명하면서, FeFET을 ‘어떻게’ 뉴로모픽 소자로 적용하여 활용하는지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질문을 좀 더 잘하면(FeFET을 이용하여 뉴런의 LIF 동작을 어떻게 구현할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로 그럴듯한 설명을 내놓기도 하지만 공학적으로 짜임새 있는 설명이 아닌 논문을 요약한듯한 대답을 내어 놓는다. 비전공자의 눈에는 그럴 듯 해보이는 모호한 표현들이 유독 눈에 띄인다. 후술할 몇 가지 이유로 인해 chatGPT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제안을 최소화 하는 편이다. 하지만 대화형 방식을 통해 적절한 질문으로 특정한 답을 유도할 수는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그 정도로 구체적이고 특정된 대답을 이끌 때, 분야가 아주 협소하거나 전문적인 경우는 아무래도 오답으로 이끌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계에 부딪히고 나면 chatGPT가 아직은 좀 나아진 ‘심심이’라는 느낌이 여지없이 든다.
그러나 chatGPT는 현재 저작권이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못하고, 그래서 논문들에 대한 접근도 제한적인 상황임을 고려하면, 이것이 기술적 한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수많은 논문의 데이터가 학습된 chatGPT는 인간 연구자를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보고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정보의 취합과 분류의 측면에서는 어느 연구자 못지 않은 분석력을 보일 것이라 예상해본다.
결론적으로 chatGPT는 아주 폭넓은 분야에 대해서 전공자 수준의 깊은 지식까지도 잘 다듬어서 설명해 줄 수 있고, 사용자의 요청에 맞는 형태로 쉽게, 혹은 자세하게 때로는 그 이상의 요구 조건(현학적인 표현을 곁들여서/ 좀 더 감상적인 문체로 / 시, 소설 등의 형태로)에 맞는 답변을 내놓을 수 있다. 반면 결과물의 신뢰도 문제와 편향성 문제는 머신러닝 기술의 고질적인 취약점 중 하나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금도 계속 수정되고 개선되는 중이지만, chatGPT는 아직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더욱이 ChatGPT는 대화형 서비스인데다 정보를 가공해서 제공하는 만큼 오류를 사실인냥 전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편향성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대화 중간에 자꾸만 이러한 점으로부터 사용자가 편향되지 않도록 하는 당부의 말을 반복하고 전문가와의 상담을 종용하는 노력이 엿보이지만, 이러한 수준은 아직 아쉬운 게 사실이다.
왜 이슈가 되었나?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경외심도 한몫 하겠지만 chatGPT의 이슈화는 구체적이고 파급력 있는 실례가 발생했기에 더 화제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제일 먼저 이슈가 되고, 지금도 제일 큰 이슈가 되는 부분은 많이들 알다시피 엉뚱하게도 교육계열에서 발생했다. chatGPT가 숙제 대신해주는 기계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학생을 평가하는 주요한 수단 중 하나다. 자료를 정리하고, 그 진위를 확인하고, 내용을 이해한 뒤, 이해한 내용에 따라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를 다른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형태의 논리 정연한 하나의 글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바로 ChatGPT가 질문하는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와 동일하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여기에 높은 자유도와 적절한 응답능력은 에세이 형태로 적절한 변환까지 수행해주기 때문에, 학습 상태와 지시문에 따라 매번 완전히 다른 (애초에 과제는 모범답안이 존재하기에, 정답이 없더라도 그 독창성에는 한계가 있다.) 에세이를 작성해 줄 수 있는 chatGPT는 완벽한 치팅 도우미가 된다. 이제 학생의 능력을 에세이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두려워하고 우려해야할 일일까? 한 편으로 지금의 문제가 정말 별 것 아닌 일일까?
인간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인공지능 서비스가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다른 기술의 등장때보다 바짝 긴장하는 경향이 보인다. 체스를 이겼을 때, 바둑을 이겼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성취에 기뻐하기보다 무언가에 도전받는다는 기분을 받은 듯 했다. 허나 나는 최근 이세돌 9단의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것은 아니지 않나”라는 당시 인터뷰가 의외로 인공지능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가장 자세를 가장 올바르게 보여준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입지가 도전받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공지능을 인간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도구는 인간의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목적에 따라 편의성, 생산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도구가 계속 등장해온 것이다. 인간의 생산성이 증대되려면, 사람이 직접하던 부분을 사람이 아닌 것이 그 일을 대신 해주거나, 사람이 하는 일의 효과가 커지도록 그만큼의 일을 도구가 해줘야 한다. 결국 인간은 해야하는 일 중 중요도가 낮고 쉽게 대체 가능한 일을 도구가 대체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지능이 없는 도구는 반복적이고 단순한 작업부터 인간을 대체해 오기 시작했다. 기계가 발전하면서 반복적이되 복잡한 작업에서도 인간을 대체할 수 있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우리가 주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일들을 자동화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다가 머신러닝의 시대까지 도달했다.
머신러닝은 패턴을 발견하고 패턴이 명확한 일들에 대해서는 학습을 통해 ‘그럴듯하게’ 일을 해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어디까지나 입력된 데이터들의 추세를 따라 출력되는 예측값들이기에 만능은 아니지만, 딥러닝의 은닉층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실존적 의미를 완벽히 알기 어려운 구조의 특성이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한다. 도구의 동작원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도구가 놀라울 만치 우리가 기대하는 일을 그럴듯하게 해내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인간에게 있어, ‘인간이 아닌 것’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는 도구는 언제든 인간의 자리를 넘보는 녀석으로 오해 받기 십상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넘겨 주기를 원해놓고서, 막상 인간이 할수 있는 일을 해냈을 때 놀라는 꼴이 참으로 우습다.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되면 안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모순적인지, 인간은 이토록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걱정하는 존재다.
초창기 예술하는 AI 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호들갑 떨던 때를 기억한다. 예술과 창작은 인간만의 전유물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시와 노래, 그림과 글 역시도 정형화된 패턴이 존재한다. 오히려 그 틀이 모호하기 때문에 ‘대충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AI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은 분야라고 생각한다. 예술하는 AI는 계속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 예술의 형태를 따라하는 작품을 생산하는 기계다. 랜덤하게 패턴을 생성해내는 능력은 마치 창작의 그것과 유사해 보이지만, 어쩌면 애초에 여태까지 인간이 하던 예술이 그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벽에 부딪쳤을 때 좌절부터 하고 만다면 그것이 예술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일까?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에게 소모적인 일을 맡김으로써 새로운 곳으로 시야를 돌릴 기회를 얻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도구는 계속해서 인간이 하던 일을 대신해왔다. 그때마다 인간은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영역을 더 고도로 깊게 들여다보거나, 반대로 그 여유를 새로운 영역에 기울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왔다. 사진기가 회화를 많은 부분 대체한건 사실이고, 그래서 회화의 영역이 미술 영역에서 대폭 감소하였지만 여전히 회화 작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술가들이 집중하는 영역 자체가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점이다. 불필요한 노동의 감소는 인간의 시야를 더 넓고 깊은 영역으로 이끌어 왔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chatGPT,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 사용자는 결국 이를 어떻게 잘 활용할지를 생각하는게 우선이다. 이러나 저러나 chatGPT는 결국 강력한 도구다. 이 흥미로운 도구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역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서 chatGPT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가의 기준을 흐릴 수 있는 도구는 학습에도 효과적이지 않을까? 혼자서 공부할 때 어려운 점은 두 가지다. 정보를 얻기 쉽지 않다는 점과 물어볼 곳이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정보는 넘쳐나기 때문에 사실상 학습의 효율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필요할 때 바로바로 물어볼 대상이 있는지에 있다. 모든 분야에 능통한 존재가 돈 한푼 받지않고 (현재 부분 유료화가 진행중으로, 곧 유료 서비스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효용을 생각하면 충분히 저렴하다.) 24시간 우리 곁에 있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배우기에 최적의 환경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제 chatGPT만 더 완벽해지면 된다.
이런 점에서 chatGPT을 검색 도구일 뿐아니라, 학습 도구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순 지식을 제공하는 참고서로 쓰기에는 비효율적이나, 질의 응답을 통한 성장을 꾀할 수 있는 분야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이 도구는 언어 공부의 영역에서 비용 대비 최고의 도구일 것이라 생각된다. 프로그래밍 역시 언어를 활용하는 체계라는 점에서 프로그래밍의 학습에 있어서도 chatGPT는 좋은 보조 교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ChatGPT는 짧은 코드를 작성해 줄 수 있으며, 코드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여 줄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은 같은 GPT-3를 기반으로 하는 Github의 Copilot 과 유사하지만 언어적 설명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프로그래밍 보조 도구보다는 학습에 더 용이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프로그래밍을 독학할 때는, stackoverflow 등의 질의응답 사이트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는 것이 보통이지만, 적절한 사례를 찾지 못할경우 헤메기 쉽다는 점을 고려하면 chatGPT를 병행하여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이렇듯 학습에 chatGPT를 활용하는 노하우를 공유하는 유튜브 영상들이 종종 보이는 것을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결국 돈을 버는 기술이 살아남는다면
구글의 검색과 추천 알고리즘은 혁신적이었지만, 구글의 성공은 알고리즘의 혁신성보다 그 수익 창출 방식의 혁신성에 있었다고 본다. 구글의 새로운 알고리즘에 최적화된 ‘클릭 당 지불 방식(pay-per-click, PPC)’의 광고 모델 적용은 올드미디어의 광고 시장을 통째로 빼앗아 오면서 동시에 광고 시장의 파이를 확대시킨 변혁의 순간이었다. 한편 구글의 대항마라 불리는 chatGPT는 이러한 광고 방식에 적합치 않다. ChatGPT의 사용자는 한없이 클릭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ChatGPT가 능동적인 만큼 사용자가 수동적이게 되는 구조로 보인다. 클릭하지 않는 사용자에게 보여줄 광고는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구글을 대체할 대기업이 좌측 우측 상단 하단부에 배너를 도배해 넣는 싸구려 웹사이트 형식의 광고를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방식은 구글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광고 수익 대비 형편없는 수익만을 얻어낼 것이다. 과연 chatGPT는 어떤 방식으로 이 시장에서 살아남을까? 아니면 다른 사업의 수익을 통해 간신히 유지되는 서비스용 기술로 도태될까?
이러한 관점에서 일전에 주장한 것과 같이 ‘인간과 같이’ 생각하는 프로그램은 수요가 있는 공급인가에 대한 의문이 다시금 떠오른다. 인간이 가장 우려하고 신경쓰는 주제. 인간은 대체되는가?는 모든 인류의 관심을 모을 최고의 화두다. 어쩌면 인간형 로봇은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한 자동차 회사의 컨셉카와 같은 과시용 기술이 아닐까? 우리는 결국 우리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데 가장 효율적인 도구를 원하고, 원가 절감을 위해 부차적인 기능은 사라지길 바랄 것이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구현된 지능은 결코 인간이 아닐 것이다.
AI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이견이 많겠지만 난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 스스로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AI가 인간적 존재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순간부터 사실 AI가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인간이 인공 인간(AI)를 만들어야 할까? 글쎄.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우리는 인공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려워한다. 언젠가 필요해서 만들게 된다면 그것이 윤리적 문제가 될까?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는 결코 아니지만, 무조건적인 거부반응과 두려움에 지배되기 전에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주제임은 분명하다.
기술이 시장을 바꿀 때 – 새로운 가치과, 과도기의 고통, 빠른 기술 발전을 맞이한 인류의 숙명
사실 알 사람들은 알테지만 chatGPT의 이슈에 앞서 AI 그림 이슈가 한창이었다. 초기 AI 그림의 이슈가 AI도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호들갑이었다면, 이번 이슈는 예술의 영역이라기 보다 산업 영역의 문제였다.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의 등장으로 다시 주목받은 그림 AI가 한풀 꺾이려나 싶던 작년 중반, 언어적 입력에 대응할 수 있게 된 그림 AI 코드가 배포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핵심은 언어적 입력에 대응하는 서비스가 되면서부터였다. 특정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무단으로 학습시켜 그들의 화풍대로 원하는 그림을 양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커미션을 받는 프리랜서인 일러스트레이터 들의 밥줄 문제임과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의 문제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사건은 추후 일러스트레이터 산업의 방향성에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고, 일러스트레이터 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토록 구체적이고 뚜렷한 피해자가 대량으로 발생할 경우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들이 피해를 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토록 급진적인 기술의 등장은 사실상 대비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다.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AI 기술에 대응하기에 제도적 변화는 너무도 느리고, 특히나 인류가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조차도 벅차다. 그러한 시대의 변곡점에 위치한 사람들은 언제나 피해를 보게된다. 이른바 ‘과도기의 피해자들’이다.
문제는 이 과도기의 피해자들 중 기술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가 아닌 기술적 진화와 제도적 뒷받침 사이의 간극에서 피해를 보는 경우다. 이미 학습화 되어버린 작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남은 작가들에 대한 예방책은 무엇이 있을까? 이러한 피해자들은 온전히 이 기술의 변곡점을 기회로 삼는 승냥이들이 탈취해가는 이익만큼 피해를 보게 된다. 앞으로 기술 발전은 계속 될 것이라 예상되고, 모두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미래에 앞서 매 기술의 격변기마다 ‘기회’라는 이름으로 혼란속에서 부당이득을 취하는 이들을 어디까지 방치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필연적이지만, 그렇다고 당연하며 아무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들은 기존의 제도라는 규칙을 잘 지켜준 협력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잘한 변동에 이토록 취약한 제도라면 다가올 미래에는 아무도 제도를 지키려 들지 않을 것이고, 그 산업은 무법지대가 되어 그 피해가 모두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다.
10시, 커피와 우리의 기회 – 공학자의 마음
소설 속 주인공은 나이가 들어 커피를 하루에 한잔, 아침 10시에만 마실 수 있는 몸이 된 뒤로 바리스타 일을 배운다. 그런 자신의 결정에 대해 오히려 하루 딱 한잔의 기쁨이기에 그 기쁨을 최고로 만들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인 것인데, 사람들이 왜 이해해주지 못할까 라는 주인공의 독백은 현실적이고, 동시에 정렬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 주인 가을씨가 유독 긴장하며 맛 평가를 부탁한 원두는 ‘맛있는 원두를 아무렇게나 섞은 느낌’이었다. 주인공과 가을 씨는 이 묘한 원두에게 아주 조금만 과찬하자는 소심한 작당 모의를 한다. 가을 씨는 공정무역 원두를 써서 카페를 운영하지만, 그럼에도 커피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현지의 산업 구조를 기형으로 만드는 주범이라는 사실에 죄책감을 품어 왔다. 새 원두는 실험실에서 재배된 커피였고, 커피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선물할 원두였다. 이들의 적당한 찬사는 아직 애매한 이 원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공정하고 올바른 실험과 분석아래에서 오직 두 사람만의 작당모의는 통계적 기법에 의해 묻혀 사라져 갈 것이지만, 우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기술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무엇을 위해 우리는 기술을 요하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분명 이로운가? 그것은 옳은 일인가? 나아갈 기술의 방향이란 이토록 정답이 없는 가치 판단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기술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은 어차피 기술에 만족할 수 없다. 그러한 수준에 있는 기술의 발전 방향은 결국 인간의 의지로 결정된다. 그래서 공학자의 윤리 의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 단순히 윤리의식만의 문제는 아니기도 하다. 누군가는 맛없는 원두 앞에서 역시 인공은 자연의 맛을 이기지 못한다며 어떤 점이 형편없는지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적어 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본다. 원두의 개발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의 평가는 다를 것이다. 실험실 재배 원두가 지향하는 방향, 환경오염과 빈국의 경제구조 문제를 고려한 새로운 제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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