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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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소셜 네트워크가 생기고 나서부터 일까? 올라온 게시물에 대해서 그저 좋아요를 누르지만, 그 게시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감정의 교류가 결핍이 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명과 편리성의 발달에 힘입어 분명 감정을 소통할 수 있는 수단들은 많아졌지만 우리가 느끼고 듣는 감정의 표현 능력은 점점 퇴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종종 온정이 느껴지는 글로 나중에 찾아보고 싶다는 글은 점점 줄어들고 진실은 모른 체 자신이 바라보고 있지 않은 이면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본인이 생각하는게 무조건 정답이자 진실인 양 남들에게 차가고 날이선 올라온 댓글이 많아지는 모습은 상대방의 감정을 진정으로 공유하는 공감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파편화 되어감에 따라 ‘우리’보다는 ‘나’가 우선시 되면서 각자가 고립되어가기 때문에 면대면으로 주고받는 진심의 감정이 점차 현대 사회에서는 소실되어가는 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한 공감 불능 사회를 맞이한 우리에게 아몬드라는 책은 각성을 요구한다. 소설 내에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주인공인 윤재와 곤이가 등장한다. 윤재는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기 어려운 아이지만 어머니와 조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풍요로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온 반면, 곤이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어려서 부터 부모님의 실수로 미아가 되어 사랑이 결핍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이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태어났고 다르게 자라왔다는 이유로 괴물이라고 불리면서 비정상의 범주로 치부된 둘은, 자신들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정상인이라는 사람들로부터 공감 받지 못한다. 오히려 서로의 다른 점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둘이 서로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성장을 한다.
“난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는 걸 경계한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
과연 손바닥 안에 쥐어지는 모바일만 들여다보며 의인화가 된 우리는 공감을 하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연이 둘에게 괴물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이라는 문구처럼 우리는 개인화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윤재와 곤이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공감하지 않는 괴물화가 진행이 되버린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부정확한 자신의 세계관으로 상대를 재단하는 것은 진정한 관심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며 세상을 향한 적의를 분노와 폭력으로 표출하는 곤이를 들여다보는 윤재의 행동을 (평범한 이들이 곤이로부터 보지 못한 좋음 선함을 본 것을) 그냥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관심은 윤재가 곤이에게 했었던 들여다보기, 그저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 겉도는 관심이 아닌 진정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처치를 깊이 생각하고, 상대를 위할 줄 아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공감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함은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이기에, 나와 하나부터 열까지 동일한 사람은 없기에, 서로 다른 세상이 모여가는 사회에서 진정한 공감을 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겉도는 관심을 주는 관객일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고도성장 과정에서 내가 아닌 다른 남들과의 진정한 감정 교류까지 하는 것이 분명 벅찬 하나의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AI에 비해 월등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사회적 기술 (진정한 공감)이라는 말 만큼, 우리의 존엄성을 우리 스스로 낮출 이유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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