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menade –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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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이 아닌 것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Promenade – 이정호’를 읽고…
이규섭
최근 지인에게 그림책 선물을 하나 받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꺼낸 말이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이라 조금 웃겼다. 하도 걱정을 하는 통에 나는 조금 당황하다가 그러면 선물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선물을 주려 했다는 시점에서 그 마음이면 충분한 것일 테니까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고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산책(Promenade)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책 속에는 다양한 풍경의 그림들로 가득하다. 점묘화 질감의 푸른 톤 그림들은 정적인 순간을 담아낸 듯 고요하다. 그림들은 인생을 돌아보는 과정을 산책에 묘사하는 듯한 문장들과 함께 나열된다. 작가는 풍경의 중심에 항상 책의 모습을 담아냈다. 어쩌면 독서의 과정을 산책에 비유한 것이거나, 나아가 인생에 빗댄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밤과 밝은 아침 사이에 개선문처럼 위치한 책. 비행기 날개가 된 책.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선 기둥이면서도 하늘에서 물결처럼 일렁이는 책. 그림 속에서 풍경은 책을 경계로 전환이 일어난다. 전혀 생뚱맞은 자리에 책이 위치하거나, 혹은 책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공간이 나타난다.
어떻게 이 선물을 고르게 되었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즐거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림을 좋아하니까 그림책. 책을 좋아하니까 책에 관한 책. 그렇게 주는 것이 가볍고 좋은 선물이고, 실제로도 그랬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친한 사이에서도 선물의 속뜻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물어보는 일은 지양하는 것이 ‘선물의 불문율’이다. 이는 조금은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일일 수 있으나, 한편으로 선물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점은 퍽 매력적이다. 받는 사람이 마음껏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이 선물의 목적에 한없이 옳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물은 단지 주는 행위가 아니라 주고, 받는 행위이기도 하다. 받는 사람이 능동적일수록 선물의 의미는 배가 된다. 없던 일에 감사하는 것이 뭐 대수라고. 그러니 최대한 감사하자. 최대한 감동하자. 그리고 상상하자,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내게 이 선물을 건넸을지를.
모든 선물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얼마나 그럴듯하든 간에,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상대에게 알맞다고 생각되는 것을 고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름의 이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때때로 선물이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떠올리며 서운해하곤 한다. 하지만 선물의 역학 관계를 생각하면 이는 정말 어리석고 이기적인 생각이다. 선물의 난이도는 상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때 급격하게 올라간다. 선물이 관계에 대한 행위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사람 사이의 유대는 천천히 조금씩 강해지지만, 반대로 마음의 돌아섬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만큼 상대가 더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내게 호의를 표현한 고마운 상황이라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만약 선물로부터 상대가 나에 대해 잘 모른다고 느껴지더라도, 그럼에도 앞으로 더 잘 알아가겠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신은 서운하기 전에 감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손 위의 물건은 복잡 미묘하고, 한없이 따뜻한 일련의 과정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다. 그 사실에 슬며시 미소 지으며, 책장이 넘어간다. 거기에 또 책이 보인다. 산책길을 따라 나는 그와의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
책장에는 파란 책이 하나 자리했다. 너무 커서 책장에 그냥은 꼽지 못하고, 뉘여 넣었다. 언젠가 선물을 받았을 적에 한때는 그저 물질적인 이익이 좋았고, 때로는 과도한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어느 날 문득 선물의 의미를 생각하고서, 우리는 완벽한 체 하지만 한없이 어설퍼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기에 잘 전해지는 마음도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래서 물질이 본질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어쩌면 허례허식일지 모르는 물질적인 교환을 계속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내게 선물은 어려운 일이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그러나 책장 속에 뉘어진 커다란 책의 존재감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하나의 연결을 또렷이 의식할 수 있음에 감동하며, 오늘날까지 내게 다가온 많은 선물들만큼 나의 소중한 아는 사람(知人)들에게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 한없이 따뜻한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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