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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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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추준홍
댓글 0건 조회 2,915회 작성일 23-02-0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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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한 그루 나무만이 서 있는 시골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하염없이 기다린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고도가 누구인지, 심지어 약속한 시간과 장소도 모른 채 기다린다. 습관이 되어버린 기다림은 너무나 지루하고, 끝이 있는지도 모르는 기다림으로 지쳐가는 두 사람. 그들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발악한다. 맥락과 의미가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장난치고, 춤추고, 운동하고… 기다림에 지쳐 인내심에 한계가 도달할 무렵, 그들에게 온 사람은 고도가 아닌 한 소년이다. “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라고 전하며 그는 떠나간다.

다음날이 되고, 또 다시 둘은 같은 장소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여전히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된다. 역시나 고도는 오지 않는다. 대신 어제 왔던 소년이 다시 등장한다. 블라디미르는 그를 기억하지만 소년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또 다시 고도 씨가 오늘 밤은 못 오고 내일 꼭 오겠다는 얘기를 전한다. 소년이 떠나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내일 고도가 안 온다면 나무에 목이나 매자고 농담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1) 고도는 누구인가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이 희곡은 읽기가 힘들다. 맥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의미 없고, 해석할 수 없는 대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말 그대로 ‘혼돈’이다. 그 와중에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단 한가지.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누구일까? 무엇이길래 이 둘은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기다리고 있는가?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에게 고도는 전쟁의 종말이었을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피신 생활을 하며 전쟁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던 그의 경험은 이 희곡의 모티프가 되었을 것이다.

고도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았고 고도의 정체와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결국 궁금증은 작가에게 전해졌고,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겠죠.” 작가마저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주지 않고 대답을 관객에게 미뤘다. 즉,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절대적인 어떤 것이 될 수 없으며 각자에게 다르게 존재한다.

저마다의 고도에 대한 해석을 한 단어로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일 것이다. 구체적인 어떤 희망이 아니라 막연한 희망. ‘더 나은 미래가 있겠지’와 같은 막연한 희망 말이다. 내일은 꼭 올 거라는 말에 속아 기다림을 포기할 수 없는 것. 이러한 희망은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희망과 기다림이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돈을 많이 벌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더 나은 미래가 있겠지… 이처럼 끝없이 희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희망이 현실이 되기 보다는 절망이 눈 앞에 있기 마련이며, 희망에 가까워지더라도 다음 단계의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로지 죽음이다. 죽음만이 우리의 욕망을 잠재우며, 희망의 끈을 끊을 수 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시 이를 아는 듯, 내일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나무에 목이나 매자고 농담한다.




2) 고도를 향한 기다림.

“갈 수 없어.”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여기가 확실하냐?”

기다림은 고통스럽다. 심지어 누구인지도 모르며, 언제 올지도 모르고, 약속 장소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다리는 것은 고역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통스러운 기다림 속에서 5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버텼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러한 기다림과 고통은 두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작가는 “삶은 지배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고통은 디폴트 상태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존재를 실감한다.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거야.” 

“그래야 생각을 안 하지.”

사유는 고통을 심화한다.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그들은 자멸할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기다림의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이 택한 것은 말이다.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한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닌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





2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이 끝나면, 관객들은 깨달을 것이다.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제와 같은 오늘이, 오늘과 같은 내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걸. 그리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며 3막이 시작된다. 각자만의 고도를 기다리는 3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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