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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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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근
댓글 0건 조회 3,664회 작성일 22-11-07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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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고 사랑을 해보았나요? 물어본다면 아직까지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만 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사랑은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만 하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하는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랑에 대해 어렴풋이 가늠만 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이런 나에게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줌과 동시에 사랑이 어떤 것 인지 알려주는 책이었다.

 

 

 

“사람들은 좋은 능력과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기다리다 사랑할 대상이 나타나면

그 혹은 그녀와 성적 결합을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성적 본능에 기반한 리비도의 충족을 최우선시 하는 프로이트의 사상과는 다소 대립되는 말로 외부의 상황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져 버린 것이 나를 결정한다고 보고 싶지 않은 내 생각과 다소 비슷하다고 생각된 문구였다. 다만 에리히 프롬의 ‘사랑 받기를 기다린다.’라는 표현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사랑을 풀어낸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랑의 주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시장의 경제적 특성이 만연한 현 시대에서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우면서도 이해가 됐다. 가령 요즘의 사랑을 보고 있자면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듯 상대가 가진 외모, 경제력을 넘어서 수많은 것을 비교하고 선택한다. 이런 사회적 풍토는 많은 현대인들이 상대방에게 선택되기 위해 외모를 가꾸거나 지적 지식을 넓히는 등 자기 발전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 보이는 사랑은 받기 위한 노력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연인이나 가족에게 사랑 받기 위한 조건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수 많은 노력을 쏟지만 정작 사랑을 주는 본인의 모습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사랑하는 방법이 아닌 사랑 받기 위한 방법만 추구하는 듯이 말이다.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사랑이다.”

 

성숙한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수동적인 감정이 아닌 능동적인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능동적인 의미의 참여라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일’ 그리고 ‘주는 것’이라는 의미가 내재 되어있다. 시장적 성격이 강한 지금 ‘주는 것’이라는 표현은 희생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혹여 ‘주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추후 내가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 행동하는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마치 Give and take와 같이 말이다. 우리는 상대가 필요하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에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받을 생각으로 주는 탐욕과 필요하기 때문에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만일 뿐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우리는 혼자 서 있음과 동시에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동시에 그럴 수 없어.'라고 섣불리 규정을 짓지 말고 적극적으로 노력해 혼자 설 수 있어야 한다. 수동적 의미에서의 me가 아니라 능동적 의미에서 I가 되어 외부의 상황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지금의 나가 결정되지 않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줏대가 필요하다. 그렇게 각자가 중심을 잡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서로를 상대할 때,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아무리 산업화된 사회가 우리를 재화와 같은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려 하더라도, 우리의 존재를 반듯하게 세운 우리는 사랑을 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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