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연구,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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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 연구, 무엇이든. ”
- 건축가 김선동著 「건축가의 습관」을 읽고 -
스케치 – 건축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건축가의 삶을 가진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직업적 습관에 대해 가장 먼저 ‘스케치’를 말함과 동시에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행위라 말한다. 현대 건축 업무에 있어서 computer tool이 월등한 성능을 보이기 때문에 스케치나 모형 제작 등 수작업의 빈도는 점점 줄어들지만, 저자는 여전히 스케치를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시각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로 여기기 때문이다.
동감이다. 나 또한 어떤 일이건 시작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펜을 집어 든다. 제목을 적고, 이를 아우르는 가지를 뻗으며, 그 촘촘한 마디 마디마다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 식으로 내가 했던 일과 하는 일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을 적어낸다. 이미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면 한 번 더 꺼내어 다시 들어앉을 자리를 닦아주고, 이미 누군가의 것이라면 그의 언어로 된 가르침을 나의 언어로 된 습작으로 남겨준다. 무엇보다도 이 ‘스케치’의 가장 큰 필요는, 훗날 다시 들여다보면 명시된 내용뿐만 아니라 그때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태도를 다시 곱씹을 때 느껴진다. 자모의 크기와 휘어짐, 문장의 길이와 배치, 심지어 온점의 늘어짐까지도 당시의 나로 온전히 돌아가 몰두할 수 있게 한다. 한 점의 명화를 보면 그 시작이 된 스케치가 궁금해지듯, 내 하나의 완성(完成)에 다다르면 그제야 보일지도 모르는 시작점의 커다란 잠재가 위대함의 씨앗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글 – 건축가의 또 다른 표현의 도구
건축가는 자기 생각을 글로 전달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학생 때에는 공모전에 참석하기 위해 패널이라는 것을 꾸며야 하는데, 도면이나 투시도 그리고 다이어그램과 함께 글도 써야 합니다. 이 글은 비록 짧지만 설계의 핵심 개념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잘 써야 합니다.
나의 연구는, 가까이 있는 기관의 엔지니어분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서로의 손을 보태야만 그 의미가 더욱 깊어 진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중요시하는 부분 중 하나로 ’간결한 글과 명확한 뜻‘이 되었다. 우리는 누군가와 의견을 주고받을 때, 비록 얼굴을 마주하는 대화의 현장성이 갖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상대의 의견을 내가 준비가 된 시간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소통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나의 연구에서 내 뜻을 상대가 원하는 시간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자그마한 메모 한 장이다. 다섯 줄이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메모가 간결하면서도 명확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아가 회의나 발표에서도 잘 정돈된 글은 시간과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효과적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신뢰 – 어느 사업에서나 가장 중요한 자산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 일하면 일단 그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진행 상황을 재차 확인해야 하는 등 안 써도 될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반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하면 그 사람을 믿고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습니다. (중략). 건축이란 분야는 건축설계뿐만 아니라 구조, 기계, 전기, 통신, 토목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합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건축설계 역시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일이 진행됩니다.
신뢰는 분야를 막론하고 삶 자체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앞선 저자의 글에 잘 설명한 대로 건축이라는 분야에서 신뢰가 중요한 만큼 연구에서의 신뢰 또한 빠뜨릴 수 없다. 동료 연구원들과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 관계를 지지하는 신뢰는 단순한 학문적 차원을 넘어 비할 수 없는 커다란 도약의 기반이 된다.
이러한 ’생물적‘ 신뢰에 더해, 나는 ’무생물적‘ 신뢰의 역할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 대 사람의 신뢰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말과 글, 일과 행동, 그리고 연구에 갖는 믿음 또한 신뢰가 될 수 있고, 신뢰가 필요한 관계이다. 연구실에서 연구에 전념하는 주체로서 어제 했던 실험에, 오늘 분석한 결과에, 내일 새로이 지켜 갈 계획에 신뢰가 없다면 과연 세상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연구자가 될 수 있을까.
건축은 땅 위에 건물을 짓는 것이다. 그 땅에 지어지는 것들은 베르사유 궁전처럼 숨 막히는 화려함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처럼 경이로운 섬세함을, 부르즈 할리파처럼 닿을 수 없는 웅장함을, 종묘와 같이 단순하지만 묵직함을 가질 수 있다.
반도체는 기판(substrate) 위에 소자(device)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이 연구는 묘하게도, 건축과 많이 닮았다. 다만 역사를 조금 더 앞선 건축가의 지혜가 지금까지 이 땅 곳곳에 놀라운 건축물을 남겼듯이, 우리의 앞날 또한 각각의 자리에 존재만으로도 빛나기를 바란다. 변함없는 가치가 연속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 건축, 연구, 또는 그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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