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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회귀 – 유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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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4,711회 작성일 23-01-0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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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회귀 – 유진성

 

이규섭

 

웹소설 시장의 성장

 

유투브에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요 장면들을 계속 추천해주고 있어, 요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인기를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준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웹소설이 원작이라고 한다. 최근 국내 미디어 산업이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는지 그 윤곽이 보여 흥미롭다. 웹툰이 안정기를 맞이한 약 10여년 전부터 인기 웹툰 원작의 영화와 드라마가 다수 등장했고, 이미 하나의 영역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던 보장된 이야기들은 다른 장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1년도에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웹툰을 접했을 때, 흥미로웠던 것은 만화책으로써의 재미 뿐만 아니라 괜찮은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만화의 작품성이 순수 예술이나 문학의 그것과는 같을 수 없고, 이미지와 텍스트가 다룰 수 있는 주제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으나 그럼에도 작가의 사상과 다채로운 시선, 도전적인 시도들이 담긴 웹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웹툰으로 검증하고, 검증된 작품은 영상화 한다’는 공식이 자리 잡은지 수 년이 지나, 웹툰 시장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재되는 웹툰들 중에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만화들이 하나 둘 등장하더니 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게 웹소설이라하면 2000년대 초반에 커뮤니티에 떠돌며 어린 학생들 일부나 즐기던 인터넷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엔 취미로 쓰는 극히 흥미 위주의 소설. 그래서 때로는 소설로써의 최소한의 요건(이를 테면 맞춤법이나 구성과 같은)조차 못 갖춘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점에서 원작이 될 수 있는 웹소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오늘날엔 시장이 성장한 만큼 웹툰의 운영도 예전과 달리 체계적으로 변했다. 개인이 아닌 팀으로써 작업되고, 회사로 운영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만화는 별 것 아닌 그림처럼 보이지만, 그림을 직접 그려본 사람은 숙련자라 하더라도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투입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5분이면 스크롤을 내릴 수 있는 1주 분량의 만화는 개인 만화가 혼자서 그리기엔 시나리오까지 고려하면 한주에 온몸을 바쳐도 모자랄 분량이다. 팀이 되면 더 높은 품질로 더 많은 분량을 안정적으로 그릴 수 있으나,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이 소모되고, 비용이 증가하면 역시 리스크를 낮추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드라마와 같은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반면 가장 비용소모가 적은 웹소설은 이러한 문제로부터 여전히 자유롭고, 바로 이 점에서 웹소설 시장이 성장하게 된게 아닐까 싶다.

웹툰에서 웹소설 원작들이 등장하면서 웹소설에 관심이 늘었다면, ‘재벌가 막내아들’의 인기는 웹툰 시장보다 더 큰 드라마 시장의 시청자들이 웹소설 시장에 투입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웹소설은 그 시작이 흥미 위주의 가벼운 소설인 것처럼 아직은 대부분 젊은 층, 학생을 타겟으로 한 허무맹랑하고 재미에 치중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또 그만큼 자극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들이며, 유행에 따라 전형적인 이야기들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재벌집 막내아들’도 그 중에 준수한 결과물일 뿐이다. 현대인이 전생 및 과거로 회귀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나가는 이야기라는 틀 자체는 몇 년 전부터 이 바닥에서 한창 인기인 형식으로, 웹소설 메인 페이지에 들어가면 과거로, 미래로, 이세계로 회귀하고 환생하고 전생하는 비슷비슷한 제목을 수두룩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이 웹소설 시장의 낮은 문턱에서 비롯된 또 다른 부작용이다. 영상 매체가 검증된 이야기를 찾기에 혈안이 된것과 반대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비용이 낮기 때문에 형편없는 글들이 넘쳐나서 그 안에서 옥석을 고르는 게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접하려면 이미 영상화가 된 작품을 보거나, 포기하고 더 많은 공이 들어가는 출판계 서적을 보는 것이 좋다. 나 역시도 ‘광마회귀’ 이후로 또 다른 작품을 굳이 찾아서 읽지는 않을 것 같다. 그에 준하는 작품을 찾기도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르 문학의 입지가 상승하는 오늘날, 웹소설의 성장은 고무적이다. 당장은 허접한 수준일 지라도, 그 ‘애들 만화’가 작가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웹툰으로 성장한 것처럼 웹소설 시장의 발전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여전히 주축은 흥미 본위의 소설들일지라도 점차 그 이야기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고, 시장이 커진 만큼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담는 하위 장르를 위한 공간도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보다 훨씬 접근성이 쉬운 만큼, 5년 뒤, 10년 뒤, 네이버, 카카오 웹소설 탭에서 젊은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마주할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미치지 않으려는 미친자의 이야기 – 광마회귀

 

정신나간 우스갯소리로 가득한 와중에 뼈 있는 말 한마디. 그러한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재밌는 소설이 있다.

무림공적이 되어 쫒기는 신세인 ‘광마’ 이자하는 ‘천옥’이라는 신물을 삼키며 생을 마감하지만, 이내 천옥의 힘으로 과거로 회귀한다. 일양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객잔의 점소이(여관이나 식당의 종업원을 이르는 중국의 옛말)나 하던 남자는 어쩌다가 미친 남자(光魔)가 되었을까?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기회를 얻은 미친 남자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무협지=허무맹랑함’이라는 공식은 변치 않지만 그럼에도 무협지는 재밌을 수밖에 없는 장르다. 사실상 큰 힘을 가진 인물들의 영웅서사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슈퍼히어로 장르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무협지의 고수들 역시 엄청난 신체능력을 가졌을 뿐 엄연히 개인의 입장에서 움직인다. 그들이 무리를 이룬들, 누구의 말마따나 힘 좀 쓰는 동네 양아치 패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협지라는 장르는 무(武)라는 요소에 협(俠)이라는 요소를 더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갈 주제의식을 불어넣는다. 마치 슈퍼히어로가 영웅의 인간다운 고뇌를 하는 것처럼, 무협지는 강한 힘과 함께 ‘협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식을 통해서 인물이 고뇌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객잔의 점소이 이자하는 무림인들의 알력싸움 와중에 할아버지가 남긴 객잔이 불타버리는 사건을 계기로 ‘당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강함에 굶주린 미친자들을 죽이러 다니는 광인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미친 자로써의 삶이 끝나고 과거로 돌아가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 얻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한다. 미친사람이었기에, 아무 생각 없는 듯한 그의 행보는 사실 전생의 의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힘이 없어 상황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와 달리 기연에 기연을 거듭하고, 과거와 다른 변화들을 경험하며 성장해나간다. 그러나 결국 그는 결국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자들과 그들 앞에서 핍박을 받는 자들, 그렇게 망가진 인생들과 갱생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구제불능들까지 모든 것이 얽히고 설켜 이루어진 이 거대한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를 테면 정파(正派)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의 맹주인 임소백은 이자하가 가장 안쓰러이 여기는 자로, 미친 세상을 바로잡고자 전생에서부터 홀몸으로 고군분투하는 사내다. 단독으로 행동한다면 더 나아가고도 남을 사람이 자신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하들과 무공의 강함을 겨루기 바쁜 어리석은 동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허우적대며 그 스트레스로 점점 메말라간다. 자하는 그가 광증에 빠지지 않은 것에 감탄하며, 어쩌면 그 역시도 더 오랜 시간 뒤에는 미쳐버리지 않았을지 걱정한다. 답답한 자들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답답한 세상을 마주할 때마다 광증이 도지지만 전생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는 나날이 반복된다.

이자하는 결국 세상은 협객이 구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미친놈이 미친놈을 낳고, 결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세상으로 변해가는 상황에서는 미친놈을 모두 처단하는 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세상에는 자꾸만 그런 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대 방향에서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 자신은 한심한 놈이며 동시에 미친놈이라 협객이 될 수 없으니, 적어도 협객을 길러내자는 새로운 목표를 품는다. 

결국 모든 사람은 사연이 있고, 악당에게도 사연은 있다. 그러나 모두가 거기에 순응하고 안주한다면 세상은 미쳐 날 뛸 것이다. 같은 인생을 살며 한 사람은 광인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협객이 되었다. 허무맹랑한 소설의 줄거리처럼 분명 우연의 도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의 무공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지향하는 방향에서 드러난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바꿀 수 없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의 논리를 관찰하고 나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망상에 휘둘리고 있다. 나다운 삶을 사는 것, 보다 의미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보다 어디서 뻐길 수 있는 강한 힘을 손에 넣고자 아둥바둥 거리는 원숭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더 성장하고 더 강해지는 패도를 추구한다. 더 많이 알고, 일처리가 더 뛰어나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마치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에 떤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 마저 가리지 않는 열정을 보이고, 그 과정에서 범하는 우들을 젊은 시절의 치기나 혈기 등으로 웃어넘기면서 결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그들의 삶은 그것을 보고 자라나는 후인들에게 참 좋은 본보기가 된다. 강함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휘둘린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강해지려는 것일까?

우리는 약자가 아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어느 정도의 경력을 가지게 된 나는 아마 앞으로 더 이상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고도 나의 생을 다잡을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가까스로 있을 것이다. 배움을 가진 자가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한다면 누가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한 명의 올곧은 사람으로 서는데 집중하지 않는다면, 누가 올 곧은 사람이 되려고 할까? 언제까지 더 성공한 사람들, 더 강한 사람들을 우러러보고 시기하면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는 뒷전으로 미뤄둘 것인가? 천하제일인이 될 때까지?

이자하는 천하제일인이 된 이후 패자에게 담담하게 말한다.

“한 때의 강함을 누구에게 자랑하겠소.”

그의 목적이 천하제일인이 되는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 한탄한다. 이자하는 단 한 명의 협객을 기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협객은 마음이 강한 자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한 때의 강함을 자랑하기 위해 매일 다채로운 추함을 보이는 원숭이들이 바글거린다. 그러나 악순환은 선순환으로 끊어내야 하는 법이고, 감사하게도 세상에는 원숭이들의 비아냥 거림에도 선순환에 마중물을 붓는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고,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중 대부분은 분명 엄청난 공력을 자랑하는 고수는 아닐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협객이 아니면 누가 협객일까? 악인을 처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방편에 불과하다.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실천과 그러한 영향력을 넓혀가는 삶이야 말로 협객을 길러내는 삶일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고군분투할 때에 우리는 또 한 명의 광인을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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