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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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동네 동사무소 안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책이 그렇게 많았던 곳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곳에서 읽었던 책 몇 권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홍승우의 '비빔툰'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는 그냥 그림이 귀엽고, 가족들이 나오는 만화라서 별생각 없이 넘겨봤던 것 같다.
결혼이나 육아, 생활 같은 말들은 나와 아주 먼 단어였고, 만화 속 어른들의 걱정도 사실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만화 속 이야기는 거창한 사건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밥을 먹고, 아이를 돌보고, 부부가 다투고, 다시 웃고, 피곤한 하루를 넘기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장면들이 오래 남았다. 아마 내가 요즘 결혼이라는 일을 실제로 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최근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도 했다. 말로 하면 간단하다. 서류 한 장을 내고, 서로의 이름이 같은 주소와 같은 관계 안에 묶이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 과정을 지나고 보니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대출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각보다 빨리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고, 그 빠름이 나를 조금 당황하게 했다.
준비가 다 된 다음에 가족이 되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준비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 돈, 서류, 일정 같은 것들이 앞에서 나를 끌고 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뒤늦게 ‘아, 내가 이제 가족을 만들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화 속의 가족들도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일은 계획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예상한 것보다 더 피곤하고, 때로는 더 유치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 따뜻한 순간들이 있다.
밥상 앞에 앉는 일, 아이의 말 한마디에 웃는 일,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도 다시 같은 집으로 돌아오는 일.
작품은 그런 장면들을 크게 포장하지 않고 보여준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가족이란 말은 크지만, 실제 가족의 하루는 대부분 작고 반복적인 일들로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결혼 전에는 결혼이 하나의 도착점처럼 느껴졌다.
해야 할 절차를 마치고, 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하면 어떤 안정된 상태가 올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어쩔 수 없이 혼인 신고를 하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혼은 도착이 아니라 시작에 가까웠다.
이제부터 함께 결정해야 할 것이 많아졌고, 혼자 감당하던 불안도 둘이 나눠야 할 몫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든든하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난다.
내가 누군가의 배우자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앞으로 생길 문제들을 잘 넘길 수 있을지,
언젠가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된다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얼마 전 대학원 선배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나에게 결혼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출산과 육아가 곧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일들이 조금 먼 이야기 같았다. 드라마나 책 속 이야기, 또는 부모님 세대가 이미 지나온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는 내 주변 사람들이 직접 그 길에 들어서고 있다.
누군가는 혼인신고를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기다리고, 누군가는 집을 구하고, 누군가는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매일을 버틴다.
그 모든 일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만화 속 작가는, 가족을 지나치게 아름답게만 그리지 않는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가족 안에는 웃음도 있지만 피로도 있고, 사랑도 있지만 서운함도 있다.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더 쉽게 상처를 주고,
또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별일 아닌 듯 다시 말을 건다.
그런 모습들이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가족은 늘 감동적인 장면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끔은 생활비 걱정에, 가끔은 잠 부족에, 가끔은 서로의 말투 하나에 예민해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럭저럭 맞춰가며 살아낸다.
나도 지금 그 출발선 근처에 서 있는 것 같다.
아직은 모든 것이 조금 빠르고, 조금 어색하고, 조금 무섭다. 혼인신고라는 말도, 배우자라는 말도,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집이라는 말도 아직은 완전히 내 몸에 붙지 않았다.
그래도 책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 누구도 처음부터 능숙하게 가족이 되지는 못한다.
우리 모두 서툰 채로 시작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조금씩 배워갈 것이다.
가족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이름이 아니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걱정하고, 같이 지치고, 다시 같이 일어나는 하루들이 쌓이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는 생활에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의 나에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대단한 조언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설픈 시작을 지나왔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멀리서 보면 커다란 사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오늘 하루를 넘기는 일이다.
나도 앞으로 많이 서툴 것이고, 아마 여러 번 당황할 것이다.
그래도 그 과정이 나만 겪는 특별한 두려움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가족의 탄생과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미래들은, 누구나 무섭지만 곧 누구나 겪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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