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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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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준
댓글 0건 조회 322회 작성일 26-06-16 09:22

본문

 

 

논문 쓰다 한눈판 무인도에서 스토리텔링을 배우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요즘 매일같이 모니터 앞에 앉아 논문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수많은 측정 데이터와 복잡한 분석 결과들을 엮어내며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팩트만 건조하게 나열하고 있을 뿐 글의 흐름이 뚝뚝 끊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논문이 철저히 논리적인 글이라 해도, 결국 내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면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흩어진 정보들을 매끄럽게 엮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뼈대를 단단하게 잡고 글의 짜임새를 높일 수 있을까 답답하던 차에, 지난 주말 본가 서랍장에 꽂혀 있던 낡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였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중간고사를 코앞에 둔 시험 기간만 되면,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들이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푹 빠져들곤 했다. 기한에 쫓겨 숨 막히게 글을 써 내려가야 하는 지금도 그 불치병이 어김없이 도진 모양이다. 어렸을 때 이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러 번이나 읽었던 책이지만, 잠시 머리도 식히고 이야기의 탄탄한 구조를 다시 뜯어보고 싶다는 핑계로 먼지 쌓인 옛 서적을 챙겨 왔다. 그리고 다시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도피성으로 시작했던 독서에 완전히 홀린 듯이 빠져들고 말았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80년도 더 전에 쓰인 아주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읽어도 전혀 촌스럽거나 어색한 구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쏟아지는 자극적인 스릴러물처럼 독자의 시선을 억지로 끌기 위해 묘사를 너무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건의 인과관계만 딱딱하게 쫓아가느라 글이 너무 단조로워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꽉 막힌 모니터 앞에서 그토록 찾고 있던 '정리를 통한 스토리텔링'의 정석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영국의 외딴섬, 완벽하게 고립된 무인도다. 각기 다른 과거를 가진, 서로 일면식도 없는 열 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초대를 받고 섬에 모인다. 첫날 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턴테이블을 통해 흘러나온 정체불명의 기괴한 목소리는, 이들 모두가 과거에 교묘하게 법의 망을 빠져나간 살인자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풍우가 몰아치며 섬은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밀실로 변하고, 각자의 방에 적혀 있는 전래 동요 '열 명의 꼬마 병정' 가사에 맞춰 사람들이 하나둘씩 끔찍하게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극도로 절제된 방식으로 통제한다. 잔인한 범행 수법이나 억지스러운 반전에 기대는 대신,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상황이 주는 압박감을 이용해 서사를 촘촘하게 쌓아 올린다. 외부인의 개입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남은 자들은 살인마가 결국 우리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경악하며 서로를 맹렬하게 의심한다. 살고자 하는 생존 본능과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죄책감이 뒤섞여 이성을 마비시키는 과정이, 오글거리는 감정 과잉 하나 없이 아주 담백한 문장들로 이끌어진다. 불필요한 곁가지 없이 목표를 향해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글의 구성과 표현력이 정말 압권이었다.

 

   특히 식탁 위에 놓인 열 개의 병정 인형이 사람이 죽을 때마다 하나씩 사라진다는 설정은, 독자가 인물들과 동일한 속도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만드는 아주 영리한 계산이다. 작가는 독자가 어느 시점에 의문을 품고 어느 시점에 긴장할지 정확히 파악하고, 꼭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 던져준다. 글을 읽는 사람의 호흡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꼼꼼한 정리와 치밀한 배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산더미 같은 데이터를 띄워두고 '어떻게 정보를 배열해야 설득력 있는 흐름이 생기는가'를 고민하던 나에게, 이 소설의 플롯은 그 자체로 훌륭한 참고서가 되어 주었다.

 

   마지막 생존자마저 목숨을 끊고 섬에 정말 '아무도 없게' 된 미제 사건의 진상이, 훗날 범인이 남긴 편지로 낱낱이 밝혀지는 결말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구구절절한 호소 없이 철저하게 짜인 논리적 구조만으로 독자를 완전히 설득해 낸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범인이 누굴까 조마조마해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던 책이, 답답한 논문 작업 앞에서 다시 펼쳐보니 완전히 새로운 질감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수식어나 단조로운 나열 없이, 뼈대가 튼튼한 구성력과 담백한 표현력만으로도 최고의 몰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기분 좋은 일탈을 마치고, 흩어져 있던 내 연구 데이터들도 읽는 사람을 배려하는 이 단단한 스토리텔링의 뼈대 위에 다시 차분하게 엮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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