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알랭드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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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드 보통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동안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심리적으로만 들여다본 요소이다. 하지만 이 책을 따라가다보면 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이며, 거시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글쓴이가 불안의
요인으로 꼽는 ‘기대’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질투는 불균형적인 관계가 아닌 우리와 동등하고 근접하다고 여기는 관계에서 성립된다. 따라서 우리의 준거집단 내에서의 상대적인 위치 비교하면서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평등 사회의 개념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시야를 확장시켰다. 사회의
모든 특권을 폐지하게 되었고 가난한 자도 부자들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였다. 반감을 느낄 수조차
없이 신이 정해주신 질서라고 생각했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에는 모든 이에게 무조건적인 기회가 있다고 말하며 기대에 대한 좌절을 이끌고 있다.
민주주의는 기대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철거해버렸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물질적 평등을 성취할
수단이 없는데도 이론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느꼈다.
물질적 진보는 절대적인 생활을 부유하게 해주었으나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궁핍감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에서 오는 부를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아직도 자수성가하는 이들은 ‘노력’ 하나면 모두가 해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더 심한 기대를 하게 만든다.
글쓴이가 불안의 또 다른 요인으로 ‘능력주의’를 꼬집었으며, 이는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가난은 공동체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냐에 따라서 구성원들의 자존심과 가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는 ‘능력주의’라는 평등과 자유의 의미가 함축 되어있는 관념은 오히려 낮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개인과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결과라는 당위성을 부가하였고 이는 그들의 불안으로 연결되었다.
글쓴이가 말하는 불안을 없애는 옛이야기, 불안을 증폭시키는 이야기 세가지를 정리해보았다.
- 불안을 없애는 옛이야기
첫번째 이야기 :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서양의 중세나 근대 이전에서는 가난한 이들은 두 발에, 부자를 머리에 비유하였다. 가난한 자를 신체의 가장 아랫단에 있는 발에 비유한 것은 심리적으로는 불쾌에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생존에 뚜렷한 역할이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사회에서는 농민들에 대해서 존중과 찬양에 대한 태도를 보였고, 그들 또한 자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두번째 이야기 :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기독교의 논리를 가져오자면 신에게 의존하면서 그들의 은혜로 삶을 유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선’의 존재고 신의 도움없이 삶을 영유하는 부자들은 ‘악’의 존재이며 그들이 손에 넣고 있는 돈은 쾌락에 수단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아래의 계급에 있다고 해서 그들의 도덕적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았다.
세번째 이야기 :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부자들은 단지 금전적 이들을 위한 무자비한 착취를 하는 존재로 비추어졌고,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운명을 개선할 수 없도록 사회를 조작해놓았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믿음은 그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선물해주었으며, 불가피한 체제에 대한 순응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계급의 위치에 대한 수치나 불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 불안을 증폭시키는 이야기
첫번째 이야기 :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부자들의 지출은 사회의 약자들의 생존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 만연해졌다. ‘사적인 악덕, 공적인 유익’(Private Vices, Public Benefits)라는 책의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속자들이 허영심에 변덕에 사치스러운 존재이지만 그들의 욕망과 능력은 사회를 부를 창조하고 공동체에게 이익을 주는 행동이라고 한다. 이는 과거에는 약탈자와 같던 부자들에게 명예를 선물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계급에 비난할 수 잇는 당위성까지 주게 되었다.
두번째 이야기 :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 같은 직업 선택의 기회를 가진다면 수입과 위신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개인의 재능과 약점에 비추어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수입을 평등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특권은 능력을 따라가고, 곤궁도 마찬가지이다.
이 단락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러한 능력주의의 관념이 정의로운 사회 도구로만 느껴지는가? 이는 사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모질고 가혹한 세계에 가두었다. 부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했던 것처럼 가난한 자들에게도 당위성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능력이 있음에도 여전히 가난한 자, 무능력함에도 유리한 조건에서 성공을 이룬 자들과 같이 사회적으로 피할 수 없는 불평등함에서 우리는 더욱 해답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세번째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약자는 자연의 실수이고 부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자본을 취득하기에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한정적인 자원을 놓고 ‘정의롭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을 뿐인 것이다. 가난의 이들은 더 이상 운을 논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그들 본인에게 손가락질할 수밖에 없었다. 즉, 불운한 이가 아닌 실패자로 통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개개인의 불안은 거시적인 사회의 체제에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느끼는 불안이 사실은 우리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안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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