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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 레이 브래드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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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3,049회 작성일 22-10-0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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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 레이 브래드버리

- '나의 독서'를 찾는 여정 -

이규섭

 

“TED 강연처럼 요즘 쉽게 접할수 있는 좋은 영상 자료들은 다양한 지식과 인사이트(Insight)를 동시에 제공하는데, 이러한 영상들이 어느 정도 책을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학부시절 강연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연사를 향한 한 학생의 질문이었다. 연사의 대답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종이로 된 책이 주는 그것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는 식의 진부한 대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한민국 성인 독서량이 나날이 떨어져 가는 오늘날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독서량이 다시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대중을 움직일 만큼 설득력 있지 않기 때문일거다.

 

‘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다룬 고전 SF 소설이다. 모든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들을 불태우는 방화수 (Fireman)라는 직업이 존재하는 세계. 모든 사람들은 귀마개 라디오와 벽면 텔레비전과의 교감으로 살아가며 행복을 꿈꾸는 세계. 그러나 밤이 되고 고독과 정적이 찾아오면 우울감을 견디지 못하는 세계. 우울감에 빠지면 온 몸의 액체들을 교체하며 다 잊고서 행복에 빠져버리고 마는 세계. 책이 금지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질적인 현상들은 인간이 책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반대로 그것이 없을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 보여준다.

다만,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책이 없어졌을 때 인간들이 파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이 책을 대하는 모습과 그로부터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을 다루기 때문이다. 작중의 방화서 서장 비티는 그저 규칙에 얽매여 책을 불태울 것을 지시하는 빌런(Villain)에 그치지 않고,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지는 헛점을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곡해일지 언정 누구보다 책을 잘 이해한 채로 몬태그를 혼란에 빠트린다. 한, 두 권 훔쳐보고 이제야 책에 빠져들기 시작한 몬태그와 달리 비티는 많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몬태그를 추궁한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래. 책이 뭐라고, 그까짓 거 안읽는게 뭐가 대수라고 위험까지도 감수하는지 비티는 묻는다. 세계의 기술력은 충분히 발전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보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좀 먹는 것처럼 보이는 귀마개 라디오와 벽면 텔레비전은 분명 쓰잘데기 없는 유희거리로 보일 수 있으나, 하루 종일 고뇌만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은 아닐진대 누구나 그 정도 유희는 즐길 수 있는 법이다. 비티는 책 속의 말이 얼마나 인간을 현혹시키는지를 주장하기 위해 다양한 책 속 문장들을 교차로 인용하면서 문장간의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계속해서 짚어낸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없는 것이라는 듯이.

 

책을 여러 권 읽다보면, 그리고 앞으로 더 읽어야할 산더미 같은 책들을 떠올리면 이게 과연 의미 있는 짓인지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책은 유용할 것이나 그 유용함이 반드시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이러한 회의감은 때때로 매우 타당하다. 책을 읽으면 뭐가 좋은지에 대한 상투적인 대답들이 이를 증명한다. 통상적으로 책은 효율적인 ‘간접경험’의 수단이라고들한다. 더 많은 것들을 더 빠르게 경험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직접적인 경험 앞에서 현실적이지 못한 모조품 취급되기 마련이다. 당신이 어떤 문제에 맞닥뜨려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고 하자.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에게서 느껴지는 신뢰감과 방에서 책만 보던 서생이 주는 느낌이 이토록 다르다. 결국 독서가 어떤 구체적인 효용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도 이는 잘 묘사된다. 책을 잃은 인간, 그리고 그 인간들의 사회는 무언가 결여된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이 지적으로 결여된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책이 금지된 것이지 지식이 금지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할 능력을 빼앗기고, 사고를 다양하게 확장할 자유를 잃는다.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고 말하려면 책만이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주장을 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책이 주는 장점이 이렇게나 많다는 식의 설명으로는 독서의 필요성에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 결국 책은, 책이 주는 다양한 장점들을 제공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책이 하던 여러 역할을 다양한 매체들이 분리해 가져갈 수 있게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결국 책읽기에서 오는 회의는 다시금 책읽기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때때로 그것은 여러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일부는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현재까지 책읽기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즐거움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언어를 언어가 아닌 것으로 번역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엄청난 돈을 들이부어 만드는 영화나 만화는 분명 강렬한 이미지를 뇌에 직접 전달하지만, 줄글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내 입맛에 맞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분명 독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생각을 곱씹는 즐거움이다. 책을 읽다가 멈추는 것은 영상을 보다가 멈추는 것과 다르다. 멈추는 것이지만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텍스트 속에서 그려진 세계가 나의 세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때에 나는 잠시 책을 덮고서 나의 언어로 곱씹어낸다. 때로는 격앙된 감정을 가라 앉히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의 세계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친다. 나라는 세계에 변화를 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뇌라는 창고에 지식을 한층 더 채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순간의 경험으로 스쳐 지나가버리고 만다. 시간과 공간에 의존하는 매체들은 이러한 곱씹기가 쉽지 않다. 불가능 하지 않더라도 온전히 곱씹기에 그 편의성이 확연히 떨어진다.

마지막은 결국 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책만의 장점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역시 아직까지는 책에서 가장 효율적인 부분이다. 다양한 매체의 등장과 함께 책은 답을 얻기 위한 매체로서는 경쟁력을 꽤나 많이 상실했다. 그러나 답이 아닌 문제의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여전히 강력하게 기능한다. 새로운 세계와의 접촉, 이를 내 것으로 곱씹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생각들은 그것들이 하나의 해결책이나 답이 된다는 명확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꼬리를 물고 확장되는 생각들은 물음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문제 의식은 인간을 능동적으로 만든다.

‘화씨 451’ 속에서도 수많은 의문들이 솟아나온다. 단순한 캐릭터에 대한 의문들부터 책 전체의 서사와 주제 의식에 대한 의문들 까지. 그 과정에서 나름의 답을 내릴 때도 있고, 때로는 그저 의문으로 남겨놓기도 한다. 마음 속 문답이 조금씩 쌓이며 나를 만든다.

 

‘방화서의 서장이 왜 그토록 책의 구절들을 잘 알고 있는가?’

‘책을 읽은 적이 있다면 왜 책을 태우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나? ‘

‘몬태그는 비티를 죽이고 책을 들고 도망치는 와중에도 불안에 몸서리 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가?’

‘왜 도망자들은 왜 기록이 아닌 머릿속에 책의 내용을 담고 있는가?’

‘비티는 왜 그토록 쉽사리 죽고 말았는가? 왜 스스로 무방비하였는가? 몬태그의 의심처럼 그는 내심 죽음을 바란 것인가? 그토록 날카로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미래 세계는 평화로운 듯 보이면서도 어떤 이유로 결국 전쟁 중일까?’

‘왜 도시는 결국 핵폭탄으로 파괴되었는가? 그 폐허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래사회는 왜 책을 파괴하는가?’

‘책이 없다고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인데, 책이 왜 미래인간들에게 혼란을 불러오는가?’

 

오늘날 매체들은 굉장히 자극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효율성을 자랑한다. 그들 앞에서 익숙치 않은 장문의 텍스트를 꾸역꾸역 읽어내야 하는 독서는 결국 종종 내일로 미뤄지고 마는 일이다. 그러나 활자를 상상으로 옮기는 일, 지식과 문장 사이를 잇는 일은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나를 숨쉬게 한다. 언젠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대체해줄 수 있으면서 편의성에서 밀리지 않는 매체가 등장한다면 굳이 책을 읽는 다는 행위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책의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이 비효율적일까 걱정할 필요 또한 없다. 누군가에게 없어도 되는 일이 내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건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일지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책이 삶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매일에, 천편일률적인 유행의 패턴에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급급한 삶 속에 나만의 유희거리가 하나 자리하는 일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다. 그것이 우리 머릿속에서 늘상 일어나는 언어적 사고와 결부되어 있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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