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오브 라이프
페이지 정보

본문
엔드오브라이프
사사 료코 지음
나에게 삶이란 그 의미를 쉽게 잃어버리는 물건이다. 그래서 꽤나 자주 삶의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곤 한다. 의지를 가지고 행복을 탐색하지 않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져버리고 만다. 삶이란 하루하루를 쌓아나가는 과정일까 피날레(Finale)를 위한 자기 파괴의 근원은 아닐까. 그 끝에 서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은 재택의료 현장을 직접 체험하며 다양한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이다. 그들이 죽음을 맞닿을 때부터 작별을 고할 때까지의 과정은 두려울 것만 같던 죽음의 문턱에서도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작가의 어머니는 정신이 또렷한 채로 운동 기능을 잃어가는 ‘락트인 증후군’을 앓게 된다. 그런 그녀를 365일 24시간 작가의 아빠는 간병을 도맡게 된다. 그는 완벽한 간병인이었다. 구강케어부터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삶은 수건으로 얼굴을 정성껏 닦아주고 건강했을 때 쓰던 화장수를 발라준다. 그의 아내의 강직이 풀리기 위해 공들여 목욕을 시켜주고 설사약을 먹이고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변을 긁어낸다. 그는 아내를 위해, 그녀는 남편을 위해 살았다.
이 이야기는 사실 나에게 굉장히 익숙했다. 나는 어렸을 때 건강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랜 기간동안 투병을 하셨고, 할머니는 그런 누워만 계시던 할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오래간만에 뵙던 할아버지 곁에서는 냄새가 난 적이 없었고, 흔할 수 있다면 흔한 욕창 한번 난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진지를 잡수시거나 휠체어에 탈 때면 190cm 정도의 할아버지를 나보다도 작은 할머니가 번쩍 일으켜주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병실의 서랍장에는 손자들에게 주려던 과자며 음료수, 과일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행복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졌다. 연극의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남편과 자식들이 할머니의 삶의 주체를 내몰아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틀렸음을 단번에 알았다.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 같았던 할머니의 곡소리를 들었다.
‘왜 나를 같이 데려가지 않았어. 같이 가지. 나 혼자 두고 가면 어떻게 해.’
할머니의 인생에서 할아버지 자체가 의미였으리라. 그 둘은 말을 하진 않아도 그 눈빛으로 서로 교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던 할머니의 루틴에서 할아버지의 숨결이 묻어있었고, 그 따뜻함으로도 할머니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내가 감히 알 수 없는 그들의 끈끈한 결속력은 삶의 이유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살아도 산 게 아닌 몸을 가졌던 할아버지도 더 오래 살다 가셨고 할머니께서도 그 곁을 처절하게 싸워주었을 것이다.
이 삶이 끝나서 내 형체가 삶아져도 곳곳에 내 숨결을 놓고 갈 수 있기에 남은 이들과 같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은 병세에 혹은 나이에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에게 삶의 힌트를 준다.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 뿐만 아니라 행복한 기억 또한 남겨두고 간다. 삶과 죽음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하고 삶이 있기에 죽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이번 생에서 얻은 선물'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좋겠다. 제비 뽑기와 같은 의미 없는 불운과 그 모든 우연을 보상해줄 수 있는 다음 생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있길 바란다.
마음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을 탐욕스럽게 해야한다. 망설임 속에서라도 내 발이 가려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디뎌야만 한다.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큰 목소리에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지워져버릴 것 멈춰서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성실하게 살아가려 하는 것. 그것이 종말기를 지내는 사람들이 가르쳐준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 이전글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22.10.09
- 다음글메타인지 대화법 22.10.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