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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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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3,105회 작성일 22-09-0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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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이규섭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으니, 인생이 순탄치 않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풍파가 너무나 거칠어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아는 것과 대응하는 것에는 그만큼 큰 차이가 있다. 불행은 행복만큼이나 주관적이라 누구나 한번쯤 큰 좌절을 맞이하고 때로는 방황하게 된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은 그것이 무너졌을 때의 절망의 크기를 암시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 속 마주한 크고 작은 절망 속에서 좌절하다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재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자 어류학자로 당대의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저자의 관심을 끈 것을 다른 부분이었다. 지진으로 조던이 분류해온 모든 물고기들의 완모식 표본(holotype, 하나의 종을 최초로 명명할 때 그 최초의 표본)이 병에서 깨져 나와 뒤섞였을 때, 그가 한 일은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표본과 생선을 바늘로 꿰는 작업이었다. 자신이 이루어 온 모든 것들이 혼돈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 좌절의 순간에, 인간을 압도하는 장엄한 자연 법칙 앞에서 그가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일지 저자는 알고 싶어했다.

아버지의 대답은 그녀에게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인생의 의미가 딱히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소 과격할 수 있는 이 문장의 뒤에는 인생이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애쓸 시간에 지금이라는 인생의 순간에 스쳐가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 역시 담겨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자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아버지와 같이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했고, 우리의 인생이 가치있다는 증거, 자신이 계속 살아가야 할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희망을 ‘증명’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남들과 다른 탓에 어려웠던 학창시절, 그리고 남들과 더 달라서 이해받지 못했던, 사랑했던 언니의 힘들었던 삶을 통해서 그녀는 세상이 참으로 매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인생이 사람을 이토록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왜 열심히 살고자 하는 사람을 더 사지로 몰아넣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책 전반에 걸쳐 과학적 사실들을 녹여낸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과학자였거나 그녀의 직업이 과학기자여서 였다기보다, 그렇게 얻어낸 답이어야만 그녀가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조던의 인생을 좇으며 그가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조던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그의 아버지와 다른 모두가 그래왔듯 과학적 세계관 아래 교묘히 숨겨져 있던 자신의 신념과 다시금 그 근간이 되는 신앙적 진리였다. 그렇기에 고난의 순간에 그를 일으킨 것은 스스로의 신념에 위배되는 거짓된 자기기만이었다. 조던이 지진 직후 에세이에 남긴 ‘운명의 변화는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달콤한 거짓말은 다시금 일어서기 위한 되뇌임이었다.

그리고나서 저자는 조던의 추악한 면모들을 비로소 마주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우생학을 지지하고, 제인 스탠포드의 살인사건을 은폐한 전력이 있다. 그럼에도 조던은 성공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많은 과오에도 그는 스탠포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었고, 수많은 저작을 남긴 대학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영향력으로 세상에 많은 흔적들을 남겼고, 때때로 그 흔적들은 타인의 고통을 수반했다. 무차별적인 ‘자기기만’과 ‘긍정적 착각’에 아무런 대가가 없다는 허망한 결론이었다. 결국 그녀의 우려대로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말만을 남기는 것일까?

저자는 오늘날 학술적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조던에게 돌아갈 반격의 서막으로 소개한다. 학술적으로 물고기로 불리는 생물들은 하나의 분류로 묶이지 않는다. 물고기를 모두 포함하는 분류 안에는 다른 포유류 동물도 섞여들어가게 된다. 연골어강, 조기어강, 육기어강 등을 모으면 우리가 물고기라고 부르는 집합이 정의되지만, 생물학의 계보상에서 물고기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상위 분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물고기라는 개념을 하나의 큰 분류로 두고 연구한 조던의 삶에 대한 공격이자, 인간이 당연히 여기는 진리라는 것들의 불완전성에 대한 지적이었다. 분류학에 대한 조던의 관점에는 그의 주관이 섞여 들어가 있었지만, 그는 이것을 하나의 신념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학문에 몰두했던 수줍었던 소년은 우생학을 지지하고, 살인 사건을 은폐하는 학계의 권위자로 변모했다. 그의 추잡한 과거가 수면위로 드러나고, 스탠포드에 자리한 그의 기념관이 사라지게 된 사실을 전하며 불공정했던 해피엔딩은 인과응보로 마무리 지어진다.

잘못된 범주화는 다수의 관심에 벗어난 이들에게 무심한 폭력을 일삼는다. 우생학은 꽤나 오래 살아남았고, 미국에서는 꽤나 최근까지도 열등한 인간의 번식을 막기위한 법과 제도가 살아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그러한 제도의 희생으로 시설에 감금되어 불임 시술을 받았던 이들을 취재한다. 살아야 할 가치를 부정당한 자들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남아있는가? 범주화의 폭력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의 강한 유대에서 저자는 그 답을 찾았다. 명백한 타인인 두 사람은 시설의 밖에서도 함께 살아갔다. 사회는 그들을 독립된 개체로 온전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그들은 분명히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갔고, 그만큼 존엄했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지만 사실상 가족이었다.

사람 사이의 유대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운 것인지는 참으로 모호한 일이다. 사람 때문에 웃지만 사람 때문에 우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그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살아갈 이유를 주는 것도, 누군가의 삶을 끝자락으로 몰아가는 사회의 무자비한 폭력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사람과의 유대다. 작가는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기나긴 여정을 끝낸다.

 

사실 책 전반의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치밀하게 정리된 글이지만 돌이켜보면 내용에 두서가 없는 듯 복잡하고, 과학적 사실을 잘 섞어 내었으나 주제의식을 탐구해나가는 과정은 과학적 접근방식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관점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점이 이유라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한 깊은 골짜기 마다마다 솟아난 불만들을 모아 그 모든 것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바라듯 글을 썼다. 어찌보면 어린아이의 억지와도 같아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타날 때까지 파고 들겠다는 집요함으로 책 속 곳곳에 묻어났다. 끝없이 인용하고 인용하면서, 자신의 기대에 맞으면 의존적으로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그것을 자신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반복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원하는 세상이 오거나 그녀가 세상을 포기하거나, 그 사이의 어중간한 세계를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그런 사실을 통해 보았을 때, 저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방향성이 조금 더 옳았을 뿐 저자 ‘룰루 밀러’의 삶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그 이전 세대의 과학자들의 편견을 목격했고, 이를 극복한 다음 세대의 과학자였다. 신념이 너무 강하면 편견이 된다. 측정은 객관적이지만 해석은 주관이 섞여 들기 쉽다. 측정된 결과를 신념에 끼워 맞힌다면 그것을 과연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범주화를 경계했던 저자가 이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이러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여러 편견이 무신경한 범주화에서 온다는 생각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엉성한 부분이 있다. 범주화는 정보가 흘러넘치는 복잡한 사회에서 인간에게 효율적이고 그래서 불가피한 사고방식이다. 이를 바로잡고자, 그저 끝없이 모든 기준을 의심할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책이 없는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저자의 태도는 모든 범주화의 기준을 흐리고 대충 넘기자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 자체로도 엉성한 의견인 뿐더러 그토록 치밀했던 초기의 서술과도 마찰을 일으킨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다지 크지 않은 반전으로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다. 말장난에 불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모든 분노가 인간과의 유대라는 결론으로 이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분노가 느껴질 정도로 집요한 분석에서 이어졌다기에는 허무할정도로 허술한 연결고리를 가진 산뜻한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서술을 계속 지켜보면서 결국 사회 전반의 관용이 더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흘려 넘기지 않고 완벽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상이 모르는 고통을 앓는 것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한 일이다. 그러한 고통을 겪고 나면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차고, 결국은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결말을 간절히 바라게된다. 결과론적인 세상에 대한 기대는 결과론적인 결말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처럼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크고 작은 부분에서는 저자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들이 원하던 대답을 색다르고 치밀하게 전개한 이 책에 이토록 수많은 독자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금 든 생각은 그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관대하기를 바라는 것’이 관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3자의 게으름이요 귀찮음의 표현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 가장 급한 관용은 고통받는 이들이 일부나마 세상의 불합리를 흘려넘길 수 있도록 사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의 기억은 깊다. 그 기억을 자꾸만 들추어내고, 눈앞에 보여주는 세상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잊으라고, 흘려넘기라고 말한다. 언제올지 모르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가 있을 것이라고 어르고 달래면서 말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이러한 고문에 반항하기 마련이다. 정말 다행히도 저자는 사람사이의 유대로 현실의 거친 파도를 견딜 수 있다는 결론을 공유했다. 그렇다면 아직 살 만한 우리는,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하고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망 앞에선 그들에게, 어쩌면 미래의 우리 스스로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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