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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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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2,956회 작성일 22-06-07 19:20

본문

부끄럽지만 경험해보고 안 것인데, 사람이 정말 바닥까지 정신적으로 침몰하게 되면, 일상에서 해야 할 – 예를 들면 청소, 빨래, 정리정돈, 세 끼 챙겨먹기 같은 – 일조차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해야 하는 것들이 된다. 쓰레기가 방에 굴러다니는데 그것을 쓰레기봉투에 담는, 그런 일 조차도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때엔, 단 몇 초의 시간 동안에도 정말 많은 어두운 생각이 스쳐간다. 누가 나를 위로할까, 나를 기억해줄까. 아니, 그 기억해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더냐.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었노라고 어느 시인은 근사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는데, 사람이 사람 손에 스러지고 상처받는 이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더냐.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 본문 1부 中


소설 <밝은 밤>은, <쇼코의 미소>로 유명한 최은영 작가가, 생계의 수단이었던 글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할 정도로 심적으로 괴로워했던 1년을 등장인물 ‘지연’에게 담아서 쓴 작품이다. 증조모(작중 이름이 등장하지 않음)-할머니(영옥)-엄마(미선)-딸(지연)으로 이어지는 4대의 삶을 비추며, 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상처를 서로 보듬어가는 이야기를 다뤘다. 대학원 과정 중에 결혼한 남자가 바람이 나서 이혼한 지 1년이 안된 지연. 자신의 또 다른 딸(지연의 언니)을 어린 시절에 사고로 잃은 트라우마를 안고 따뜻함이라곤 없고 심지어 폭력성이 있는 남편과 살아가는 미선. 그리고 전쟁 통에 이리저리 피난하던 증조모를 따라 희령(강원도 회양 지역의 옛 지명)에 정착했다가 거기서 북에 처자식이 있음을 숨긴 한 남자와 결혼했다가 배신당한 할머니(영옥).

 

 

지연은 천문학을 전공한 박사이며, 남편과 이혼한 뒤 희령에 있는 한 천문대에 일자리를 얻어서 희령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연히, 어렸을 때 이후로 만난 적 없던 할머니를 만나고, 때로는 밤하늘 아래서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가며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가는, 그런 뻔하지만 그래서 따뜻한 서사다. 이혼한 지연에게 은근히 실망한, 그리고 뭐든지 참으려 하는 미선(엄마)이 답답한 이 둘도 서로의 아픔을 대면하면서, 그리고 때로는 격하게 다투다가 종래에는 결국 서로에게 돌아오는, 그런 이야기다. 비록 다른 일을 겪었지만, 그 때 내가 겪었던 감정선과 소설 속 주인공들의 그것이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나도 사람이 무서웠던 적이 있었지.

 

“그거 알아? 엄마가 언닐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든 거야.”

“없는 척한다고 해서 없는게 되진 않아. 나에게도 말할 권리가 있고.”

“날 가장 무시한 사람은 너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넌 항상 내 인생을 부정했어.”

– 본문 4부, 中


 

워낙에 많은 소규모 서사가 전개되는 터라 여기에 많은 것을 담아내지는 못하겠다. 다만 한 마디로만 응축한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 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설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어느새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살아내는 숨이 한데 모이는 과정이라는 것.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 잠시 동안 든 감상은,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 조금만 다정했으면 한다는 것. 혹시 아는가, 그 순간의 감정을 지금 이 소설로 담아낸 작가처럼 그 다정함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길이 되어 줄 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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