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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오빠의 실용음악 기초이론 – 윤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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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2,849회 작성일 22-08-0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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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오빠의 실용음악 기초이론 – 윤영석

이규섭

 

대학원에 입학한 뒤, ‘음악은 역시 작곡이지.’ 라는 생각에 실용음악 입문서를 구입했다. 연주는 순간이고 작곡은 기록으로 남는다는 일차원적인 생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돈은 작곡이 다 번다는 머릿속 서열에 따른 편견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역시 악기로 연주하면서 봐야 뭘 좀 알겠다는 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배운 음정과 3화음이야 익숙했지만, 뒤이어 나오는 조성과 코드, 모드와 비화성음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거의 다 흘리면서 읽은 것 같다. 음악을 어려서부터 꾸준히 해오지 않은 입장에서는 참 와 닿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기초이론도 이토록 낯선데, 전문적으로 음악을 다룬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하나의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그 모든 규칙들을 조화롭게 구현하는 기술적인 일이다. 동시에 그 결과는 수준의 높고 낮음에 무관하게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예술적인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촌스럽고 자극적인 싸구려 광고 음악 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어린시절 향수를 일으키는 서정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 작곡가 유희열의 표절 논란으로 인터넷이 시끄럽다. 비교적 최근의 곡들부터 옛 곡들까지 들추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비판인지 비난일지 모르는 말들을 퍼붓고 있다. 저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곡의 유사성이 다수 확인되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논란이 한층 수그러들고, 대중의 분노가 가라 앉은 뒤 다시 한번 들여다보아야 할 일이다. 이와 별개로 정말로 유희열이라는 개인이 과연 사람들이 비난하듯 그토록 비도덕적이고 비열한 인간인지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어떤 행위가 비열한지는 그 의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창작에서 표절의 의도는 본인만이 아는, 어쩌면 본인조차도 모르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 또한 훗날로 기약을 미루기로 한다.

창작, 그 신화적 환상

상업적인 측면에서 표절을 행한 작가들은 분명히 부정한 방법을 취한 것이 맞다. 창작의 과정에서 사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타인의 권리를 유용하는 행위는 관련 문화 생태계의 측면에서도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지탄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이 점을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그 대책이라는 것이 표절을 저지르지 않도록 작가들에게 더 엄격한 윤리의식을 요구한다거나, 그러한 작가들 내에서 그러한 윤리적 의식이 공유될 수 있는 성숙한 창작 문화를 형성하고 나아가 이를 유지할 수 있는 견고한 시스템을 갖추자는 방향이라는 점은 허울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의견은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들이고, 구체적인 듯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며, 결국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예술 활동에서만 유독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온전하게 작가의 창작으로 여겨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존의 것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 만들어진 새로운 것이 있기는 할까? 그런 것이 있다면 모두 원시적인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 모든 문제가 예술가들이 창작을 너무 과대평가하였기 때문인 것은 아닐지 의심해보았다. 그렇게 주어진 과대한 보상이 창작자들에게 큰 리스크로 돌아가니, 보상만큼이나 표절에 대해서도 훨씬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이다.

창작은 결국 모방에서 온다. 어떤 작가들은 표절을 피하기 위해서 기성 작품을 피한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방식도 표절과 창작의 경계가 모호한 점을 어떻게 든 극복하기 위한 온 개인의 방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의도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인데, 사실 도덕성의 여부는 의도에서 오는 문제이지만, 표절로써의 문제는 결과로 정해지는 것이기에 내가 모르고 만들었어도 이미 세상에 있던 것이라면 표절이 될 뿐이다. 결국 아이가 말을 배우고 그 다음에야 이야기를 쓸 수 있듯, 창작은 자신이 학습한 것들을 기반으로 확장되는 것인데 오늘날 우리는 창작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같은 개념으로 인지한다. 우리 같은 범인은 잘 모르는 아무튼 아주 어렵고 고통스러운 고뇌의 시간을 거쳤을 때 비로소 천재의 머리를 스치는 ‘영감’이라는 신성한 것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영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분위기조차 얼마나 찬란한가? 예술은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천재는 남들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는 생각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예술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래서 더없이 신성하게만 보이니까. 그러나 ‘미술사 아는 척하기’(리처드 오스본 저)에서 언급된 바 있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천재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르네상스 시기에 고착된 선입견이다. 그것이 너무 깊어서 역으로 천재들이 그러한 역할에 스스로 빠지는 사례조차 보이지만, 반대로 우리는 많은 사례에서 동네 아저씨, 아줌마 같은 수수한 외모와 지극히 평범한 행동 양식을 보이는 기라성 같은 천재들을 보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은 그런 천재를 기대하지 않는다. 천재는 뭔가 조금은 독특한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고 말하면서도 예술의 신성함, 창작의 신성함을 위해서 신화를 덧붙이고 마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의 음악에는 다양한 인력이 투입된다. 작곡가 뿐만 아니라 편곡자도 있고, 또 음향을 전담하는 전문가가 있기도 하다. '김이나의 작사법'(김이나 저)에서는 최근 대중가요에 자리잡고 있는 A&R (Artist and Repertoire)라는 직업을 소개하기도 한다. 세션맨(Sessionman)들은 또 어떠한가. 유명한 앨범들은 그에 걸맞은 뛰어난 세션맨들을 부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것은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 다른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의 반증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연주자들을 기술자라며 폄하하지 않는다.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곡의 창작에는 이러한 연주자들의 예술적 기여는 왜 창작과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는가? 연주의 독창성은 작곡의 독창성보다 더 법제화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늘날 연주자들에 대한 상업적 인정은 매우 박하다. 스타 한 두 명이 아니고서는 새로운 소리를 위한 그들의 노력은 새로운 악보보다 훨씬 저평가 받는다. 창작가의 찰나의 고통은 사후 70년까지도 보호하면서, 자신만의 연주를 하기 위해 들인 수많은 노력의 시간들은 왜 그 순간의 도구로 활용하는지 예술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예술

유사성의 측면에서 음악은 시간이라는 축에서 다양한 길이를 가지는 음계들의 연결일 뿐이다. 따라서 작품의 유일성과 독창성을 멜로디나 코드의 진행정도로만 한정 짓는다면, 음악이라는 장르의 다양성은 대폭 축소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멜로디와 곡의 진행은 사실상 수백곡, 수천곡씩 써내려온 클래식의 거장들에게 그 권리가 있을 것이며, 나머지는 다 그 아류에 불과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들 시대에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면, 그들의 음악 역시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의 작품을 표절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짜르트나 베토벤 같이 어마무시하게 작곡을 해대던 작곡가들이 오늘날의 인물이었다면 표절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곡들에도 표절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비슷함의 기준 또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음계의 조합이 유한하다고 해서 음악의 가치가 퇴색되거나 작곡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단어의 조합이 유한하다고 해도, 이야기는 다채로울 수 있고, 같은 문장도 때로는 하나의 문단도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음악이 주는 감동도 멜로디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유명한 곡은 멜로디로 기억에 남지만, 그 멜로디는 곡이 남겨준 감동을 쉽게 끌어내주기 위한 트리거(Trigger)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곡가는 멜로디를 비롯한 곡의 모든 구성요소가 자신이 창작해 낸 것이라는 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뛰어난 작곡가는 음이라는 도구를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것으로 색다른 감동을 주는 사람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고, 아무나 할 수 없으며, 많은 이론과 경험을 기반으로 쌓아올려진 기술적인 일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은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 동시에 예술적인 일이다.

진정성 없는 존중 – 오마주(Homage) 

연이어 반복되는 표절 논란들 속에서, 오늘날 예술가들이 작품의 권리를 좀 더 깊게, 그리고 한 편 더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문이 나날이 진보하는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더 높은 곳을 향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방식에 있다고 본다. 예술은 분명 거장에 대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의 위에서 다음을 바라보는 행위에 뒤가 구린듯 행동한다. 오마주(homage)라니. 앞선 이의 발견은 뒤따라오는 이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떠받들어 주지 않으면 안되는 앞선이와,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독창성을 찾아볼 수 없는 뒤따라오는 이의 위선적인 관례가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앞선이의 지식을 이어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뒤따라 오는 이는 그 위에 무엇을 쌓아 올릴지를 고민해야 한다.

또한 오늘날 수없이 회자되는 표절 문제들은 공정성의 문제에서 비롯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이더라도 순간의 유혹에 다른 이의 노력을 유용하여 더 쉬운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고 그 과실은 온전히 제 것마냥 취한다. 이러한 부분들은 정말이지 큰 문제다. 하지만 꽤나 파격적인 이야기라 현실적인 문제가 많을 것을 알면서도, 예술에서 창작자의 기여를 좀 더 세분화하여 평가할 필요를 느낀다. 창작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창작의 가치 중 선점의 요소가 너무 크게 반영되는 점은 오늘날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오늘날 표절을 비판하는 이들은 충분한 사전 조사를 통하여 표절인지 스스로 점검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검수의 시간은 창작의 고통과는 무관한 일이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발견들이 누적될수록 검수의 고통이 창작의 고통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그것을 과연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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