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Home
  • Cultural Activity
  • Culture Column

꽃잎 한 장처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신의중
댓글 0건 조회 3,143회 작성일 22-09-03 23:29

본문

꽃잎 한 장처럼

-       이해인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최근 서울대학교 학위수여식의 축사를 보여주었다. 축사의 주인공은 서울대학교를 07년도에 졸업한 젊은 수학자 ‘필즈상’을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허준이’ 였다. 수학자가 이러한 인문적인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건네줄 지 호기심에 가득한 채로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말에는 총기가 서려있었고, 그 안에 위로가 있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삶에 대한 당부가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LDhaqosPtA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중략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그의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서 졸업하는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하다.’ 라는 저 문장에서 매번 책을 고르기가 어려웠던 내 모습도 생각났다. 이번 달도 역시 서재를 서핑하며 적절한 책을 찾으려 몇 권을 찾다 읽다 반복했다. 하지만 역시 단편 작품들은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느닷없이, 그것도 구체적으로 마주하기 일쑤였고 그게 가끔씩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역시 마음이 흩어져 있는 장편을 읽어야 하나 생각하던 와중에 시가 떠올랐다. 짧은 글귀 안에 구체적인 것 하나 없더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리보고 저리보며 내 삶에 은유할 수 있는 시 말이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찾아 읽으며 좋았던 몇 편을 공유하고싶다.

 


꿈에 본 집

 

 

 

간밤 꿈에 본 집이

꿈을 깨고 나서도

자꾸 생각이 나네

길 가던 이들까지

내가 초대를 하던

아름다운 집

 

그 집에서 나는

잠시였지만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하였지

 

요즘은 자주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사 간 이들을 생각하며

나도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될 날을

약간의 두려움 속에

그리워한다.

 

집 없는 소녀가

수녀원에 와서

시의 집을 지으며

많은 이웃을 만나

울고 웃고 했으니

후회는 없다

 

꿈에 본 그 집이

결국은 지금

내가 사는 집이었군

빙그레 웃어보는

오늘의 행복

 

함께 사는 이들이

나의 집이 되어

나도 다시

집이 되는 평온



 일생을 수녀로 살아오며, 77세 삶의 황혼에서 그녀가 쓰는 담담한 시가 주는 감동이 머리보단 마음에서부터 번져온다. 그녀는 허준이의 축사처럼 그 끝에서 기다리던 자신을 아쉬움 없이, 명징하게 마주하고 있는 듯 했다.




나무의 사랑법

 




자꾸만 가까이

기대고 싶어하지만

서로의 거리를 두어야

잘 보이고

침묵을 잘해야

할 말이 떠오릅니다

 

남의 말을

듣고 또 듣는 것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침묵 속에 기다리는 것이

지혜의 발견입니다

 

아파도 슬퍼도

쉽게 울지 않고

견디고 또 견디는 것이

기도의 완성입니다

 

사계절 내내 중심 잡고

서 있기 힘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기쁘게 사는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

땅 깊이 내려가는 뿌리

하늘로 뻗어가는 줄기

바람에 춤추는 잎사귀들

덕분입니다

 

오늘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저를

사랑으로

지켜봐주십시오

 

늘 고맙습니다


 

 내가 나무라면 땅 깊이 내려가는 뿌리, 하늘로 뻗어가는 줄기, 그리고 바람에 춤추는 잎사귀들은 무엇일까? 아직 나는 너무나도 어리다. 어렴풋한 것들을 소중하게 지켜가며 그런 것들이 나의 기쁨이 되는 삶은 생각만해도 행복하다.

 

 가을이 찾아왔다. 수녀님은 가을을 이렇게 말하였다. ‘한 번뿐인 삶을 더 맑게 더 고맙게 더 애틋하게 깨어 사는 계절’. 어느새 끝나가는 1년이 덧없기도 하지만 올해의 끝에 서있는 나를 아무런 아쉬움 없이 마주하고 싶기에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본다.

 

오래오래 생각해서 짧게 쓰는 시

길게 늘렸다가 짧게 압축하는 시

짧을수록 오래 읽는 시가 좋았다

시처럼 살고 싶었다

-       이해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