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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하나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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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중
댓글 0건 조회 2,871회 작성일 22-05-07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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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자/과학자가 신을 믿는 게 가능하냐는 말은 지인들끼리 만났을 때 가끔 나오는 화두 중 하나다. 너는 전자공학, 그것도 현대 과학의 정수(精髓)라고 불리는 반도체를 공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느냐, 하고서 말이다. 이 책에서도 역시, 몇몇 과학/공학자들이 그런 생각을 풀어낸 흔적들이 보였다.

사실 나는, 부끄럽지만, 신학에 대해서 다른 기독교인들에 비해 그리 밝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완독한 횟수가 그리 많지도 않고, 모태신앙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해당 질문에 대해서는 옛날의 나도 한동안 굉장히 고뇌를 많이 했더랬다. 아직도 가끔 나오는 화두중 하나인 기독교인으로서 진화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학과 신학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교파를 막론하고 구약 성경의 창세기는 굉장히 성경 내에서도 비중이 높은 부분이다. 하나님 (내 교파에서는 하느님, 이라고 부르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의 대부분이 개신교 교파임을 고려해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통일하겠다)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시며,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리를 주신다. 그리고 끊임없이 죄를 짓는 사람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모습이 나온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다, 가 창세기의 전체 맥락을 꿰뚫는 주제라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다.

창세기에서는 거의 항상 나오는 떡밥(?)이 있다. 오늘날 현대 생명과학의 근본인 진화학에서 말하는 것과 창세기의 창조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냐. 몇 십 억년의 세월 동안 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주류인 생명과학과 7일 간의 창조를 말하는 성경은 완벽하게 다르다. 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항상 드는 비유가 있다. 단군 신화가 그것이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간 햇빛을 보지 말고 지낸다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지만 곰은 여자로 변해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는 이야기. 오늘날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호랑이와 곰을 숭상하는 부족이 환웅을 신으로 모시는 부족과 부딪혔는데, 곰을 숭상하는 부족과 합쳐지고 호랑이 부족은 떨어져 나갔다 (혹은 멸망했다). 즉, 신화적인 네러티브 내에 내재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와보자. 창세기가 고대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내려왔다는 것은 교파를 막론하고 구약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반대 의견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당시 1일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24시간, 365일이라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을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 시기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의 그것처럼 완벽하게 정립된 시간의 개념을 알고 있었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표현은 결국, 당시 고대인의 시각, 눈높이에 맞추어 주신 것이라는 설명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 1일이 우리가 아는 그 1일이 아니며, 실제로 성경 내의 그것과는 엄청난 시간차가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연구하는 모든 진화의 흔적들 하나하나가 모두 그분의 창조 섭리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진화는 결국,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섭리인 것이다.

이렇게 만물을 운용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분께서는 결코 인간을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으신다. 언젠가 교양 수업 시간에 어느 교수님께서 내게 크리스천이냐고 물으시며 나에게 질문을 던지신 적이 있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신은 대체 왜 인간을 굳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믿게 하지 않는 것인가, 왜 나 같은 무신론자를 놔두시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 때에는 당황하고 아는게 많이 없어서 제대로 대답을 못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강압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청하라고 애타게 ‘부르실’ 뿐인 것이라고. 그것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이다. 굳이 그분이 왜 성육신을 입으시고 그 모진 길을 걸어가야 했는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겠지만, 그저 청하고 두드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외아들을 내어 주시면서 그저 우리 마음 속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연구를 하면서, 미세 구조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복잡하고 때로는 도저히 설명하기가 어려운 현상을 마주하면서 전율을 느낄 때가 많다. 때로는 그 분의 부르심과 이끄심을 느끼며, 그리고 그 분의 숨은 섭리를 조금이라도 벗겨가면서 오늘도 나는 천천히, 예비하신 길을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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