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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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 남의 나라 이야기, 지독한 현실, 누군가에겐 그저 판타지 -
이규섭
이른바 판타지물 전성시대다. 현란한 마법과 환상의 동물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초능력자들, 때로는 괴수와 좀비가 판을 친다. 사람들은 생경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환상 속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즐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은 판타지 속에서 현실적인 면모 또한 볼 수 있기를 요구한다. 상상 속 세계에 투영된 현실의 모습 안에서 그들은 몰입하고 감동한다. 그러나 허구 세상 속 현실의 모습은 언제나 단편적이기 마련이다. 복잡한 세상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선택과 집중의 방식으로 더 직접적인 메시지를 우화적으로 전달한다. 허나, 현실의 삶은 그런 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들로 가득한 다른 세계의 현실적인 이야기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를테면, 인도나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일상적 삶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다큐멘터리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사실적 정보를 받아들이고자 할 때에나 그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우리에게 있을 법한 일들이 그들의 배경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쉽사리 흥미를 잃는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판타지는 되고 그들의 이야기는 안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인류는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얽혀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계라는 이미지를 당연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과 개념의 공유는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하기에 그 안에서 약소한 문화권의 색채는 너무나 옅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이를 테면 우리는 멕시코의 밀짚모자와 이집트의 피라미드, 무슬림 국가들의 히잡과 같은 이미지들을 쉽게 떠올리며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상상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네들의 일상적인 삶을 전혀 상상할 줄 모른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다양한 국제기구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최저 생활수준은 이전과 달리 많이 개선되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그 정도는 달라도 비슷한 혜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허나 부국에도 그림자는 있듯, 그렇지 못한 국가의 그림자는 더 짙고 크게 드리우기 마련이다. 그림자 속은 너무나 어두워서 우리는 쉬이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어려운 일이고 당연하지도 않은 일이다.
세상에는 많은 어려운 삶들이 있다. 대체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연관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각종 매체, 이른바 뉴스나 다큐를 통해 보는 모습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 결과로 눈에 보이는 것들 뿐이다. 우리가 그들을 보는 방식이 매체를 통한 방관자적인 입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때 선교사 분들과 함께 교외지역을 찾아가 쓰레기 매립지에서 살아가는 극빈층의 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줄 때에도, 나는 그들이 사는 지역의 열악함과, 그들의 지친 표정, 그리고 그저 도시락 하나에도 열을 올리는 필사적인 생존 본능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일회성 활동인만큼 우리를 인도하던 봉사자분들은 우리에게 감정적 교류보다는 실질적인 도움에 집중하도록 조언해 주었다. 내가 알 수 있던 것을 그런 피상적인 것들 뿐이었다. 고작 봉사활동으로는 우리와 비슷한 영역 밖의 삶과 접촉할 수 없다. 살아가는 세계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가까이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를 일이다. 그들의 삶을 그렇게 뭉뚱그릴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바로 여기 픽션의 의의가 있다.
<찬란한 천 개의 태양>은 1950년대부터 현대로 이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격동의 시기 속에서 살아온 두 여인의 이야기다.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집권층은 수없이 자주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에 따라 그 안의 삶들도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 좋고 나쁨이 따로 있지 않았다. 이를테면 공산주의자들의 진입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를 가져다 주었고, 또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투쟁 이후에는 결국 다시 민족과 이해관계에 따라 치열한 내전이 이어질 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념과 이익을 위해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과정 속에서는, 결국 수없이 많은 희생만이 차곡차곡 쌓여갈 뿐이었다. 하라미(사생아)인 마리암과 소박하지만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라일라는 그들의 출생과 성장과정과 무관하게 고난과 역경의 삶으로 몰아넣어진다. 희망을 가지려는 불씨마저 짖밟아버리는 절망적인 순간들은 보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그들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쉽사리 허무하게 잃고 마는지, 그들이 어떻게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학대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는지 잔혹할 정도로 선명하게 묘사된다. 라일라의 가족과 친구들이 순식간에 살점으로 변해버리고, 마리암이 남편인 라시드에게 구타당하고 조약돌을 입에 넣어져 스스로 이빨을 부수게 되는 장면에서 독자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절망적인 삶 속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무언가 희망을 가질때마다 율법을 들먹이며 그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억압하는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풍경을 보며 분노를 넘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다행히도 소설의 결말은 희망적이다. 마리암은 라일라를 죽이려는 남편 라시드를 죽이고, 그 덕에 라일라는 죽은줄 알았던 전 연인 타리크와 도피할 기회를 잡는다. 두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 넣었던 라시드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마리암은 이 사회가 남편의 살인을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라일라와 함께 간다면 이 사회는 세상 전체를 뒤져서라도 둘을 잡아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었던 자신의 삶, 하라미 년의 삶 속에서 인간으로써의 교감을 경험시켜준 존재, 사랑을 경험하게 해 준 라일라와 그 딸 아지자를 위해 마리암은 스스로 남아 붙잡히기를 결심한다. 처형장에 서서 조금 두렵지만 그럼에도 후회없는 마지막을 맞이한다.
라일라는 파키스탄으로 도망쳐 안락한 삶을 손에 얻는다. 그러나 그녀는 힘겹게 얻어낸 안정적인 삶에 안주하지 못한다. 탈레반의 무장점거가 미국의 공격으로 끝난 날, 그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다시 큰 결심을 한다. 그녀가 겪어온 지옥 같은 삶을 아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 결정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타리크가 사라지면 그녀는 또 다시 지옥 같은 삶으로 빠져 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라일라를 움직인 것은 마리암으로부터 받은 것들이었다. 마리암으로부터 구원받은 라일라는 삶속에서 하나의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라일라와 타리크는 고향에 돌아가 마리암의 과거 발자취를 좇는다. 그렇게 비로소 그녀와의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마치고 난 둘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향을 복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희망을 본다. 복구되어 가는 고향의 모습, 라일라의 새로운 아이, 만약 딸이라면 무조건 '마리암'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그 아이의 태동을 느끼며 라일라는 나아간다.
허나 현대를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는 독자에게 이 결말은 다시금 절망적이다. 작년 8월 탈레반은 다시금 아프가니스탄의 장악에 성공하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재건했다. 얼마나 많은 마리암과 라일라의 삶이 다시 반복되고 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시 좌절하게 되는 것일까. 라일라의 말마따나 그들에게 여인의 삶은 공산주의자보다 조금 덜 중요한 것 정도였을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절망적인 세상 속, 가장 비참한 이들 사이에서도 희망은 확인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천한 신분과 기구한 운명, 비루한 외모와 늙고 쇠해버린 모습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라일라에게 있어 마리암은 찬란한 천 개의 태양과 같은 사람이었다. 탈레반이 무너진 날, 작가는 이 세상 어딘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절망적인 공간에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이 피어날 수 있음을 기대하며 소설을 써내려 갔을 것이다. 폐허가된 척박한 땅 위에도 달빛아래 은은하게 향을 퍼트리는 꽃(마리암 : 월하향)이 피어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어찌 그들에게 행복을 빼앗을지언정 희망마저 앗아 간단 말인가. 다시금 일어난 비극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에 휩쓸린 작은 삶들이 다시 찾아온 절망에 좌절하지 않기를 그저 바라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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