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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도 -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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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2,717회 작성일 22-07-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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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도 – 이현석

이규섭

 

최근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이 임신 15주 이후의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미시시피 주의 법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낙태죄에 대한 이슈가 급 부상하고 있다. 낙태죄가 부활한 것은 아니지만 임신 중절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더 이상 헌법의 차원에서 보호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동향이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 사안을 겉핥듯 바라보면 크게 두 가지 의견의 대립구도로 보인다. 태아의 생명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과 반대로 여성의 삶을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겪게 될 다양한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양 쪽의 의견이 모두 생명과 인권의 존엄을 다루고 있는 만큼 어느 한쪽의 의견이 우세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약 쉽사리 말할 수 있다면, 이 사안에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거나, 개인적인 성향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양분된 구도는 한 쪽 시선이 마치 반대 의견에서 내세우는 존엄성을 부정하는 논리인냥 착각하게 되기 쉽다는 점에서 안일하다. 이를 테면, 법안에 대한 싸움은 크게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적 정치 성향을 지닌 정당간의 다툼으로, 특히 미국이라는 특성상 기독교적 사상에 근거한 보수적 가치와 여성의 인권 신장에 관한 대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임신 중절에 대한 견해차는 마치 자신의 이념과 사상에 따라 상대방이 절실히 바라는 존엄성을 외면하려는 시도로 비쳐질 수 있다. 실제로 언론은 이 둘의 구도를 그렇게 그리고 있고, 사람들도 어느 새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한 때 유투브에 인기 동영상으로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의사의 증언 영상이 돌던 적이 있다. 임신 중절 수술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형상을 갖춘 아기를 자신의 손으로 조각 낸 고통스러운 기억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단언컨데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든 그 증언을 듣고서 낙태 수술에 제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한 편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이 임신 중절을 하지 못하고 더 고통스러운 삶에 빠진 이야기 또한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임신은 여성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준다. 신체에 10달간 큰 변화를 주고, 그 과정에서의 불편함과 손실은 적지 않다. 한창 때의 커리어를 1년 단위로 날리는데 건강은 악화된다니. 이 모든 불편함과 손실은 새로 탄생할 아이에 대한 사랑, 하나의 새로운 가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없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움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더 없이 아름답기에 감당할수 있는 어려움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임신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건드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 졌을 때 숭고해진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임신은 여성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균형적이고, 잔혹하다. 그러나 임신 자체가 숭고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여전히 존엄하고,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망설이고, 고민하게 된다.

시선은 다양하고, 임신 중절에 대한 사례도 이렇게 전형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삶 속에 녹아든 사회 문제들은 그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자연스레 엉겨 붙어 있어 감정적인 호소만으로 접근할 수 없다. 어느 쪽에서도 이렇듯 절절하지만은 않은, 이른바 반례가 되는 사례들 역시 많이 존재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법으로 돌아온다. 감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닥치면 우리는 이를 시스템 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더 공정하고, 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해결을 위해 사적이고 일시적인 감정들을 배제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시스템은 도구이고, 도구는 효율을 위해 사용되며, 범용적일 때 그 효율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토로 논쟁적인 경우에는 오히려 모든 사안이 독립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수많은 임신한 여성들과 그들이 뱃속에 품었던 아기들과 그 생명을 결정해야 했던 주변인들과 의사들이 마주한 상황은 제 각각이었다. 각자의 시선에서 모두가 절실했을 것이나, 경우에 따라 가장 절실한 사람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절실함은 너무 주관적이어서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척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법은 수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최선의 도구이자 사회 질서를 위한 가이드 라인이 될 수는 있으나 사회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법의 불완전성은 사안에 대한 깊은 관심과 상황에 적합한 결정으로 메워져야 한다. 그리고 개별 사안에 대한 관심과 그 상황에 맞는 대처는 당사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노와 증오는 이러한 방향성에 맞지 않다. 증오, 혐오, 원망, 조소로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개인에 대한 이해 없이 일반화된 의견은 자신의 성향대로 뱉은 말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논리를 입혀 서로를 공격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물론 법에 대한 논의는 계속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법은 여전히 가장 효율적인 제도인 만큼, 그만큼 그 방향성이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늘 관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하지만 법이 접근하는 방향은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임신 후 몇 주 까지를 아기로 보아야 하는가? 어떤 경우를 시기와 무관하게 임신 중절이 가능한 예외적인 경우로 두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은 제도적으로는 필수적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소모적인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이 진정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귀중함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 진영과 진영이 붙어 서로가 서로의 우위에 서기 위한 논리 싸움일 뿐이다. 불완전하다고 그토록 말해왔던 그 반쪽짜리 도구 안에서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 ‘지수’는 출산을 앞둔 동생 ‘해수’의 아기를 향해 ‘앞으로 내게 다가올 당신을 사랑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어쩌면 일어났을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수의 담담한 고백은, 결국 낙태라는 아주 복잡 미묘한 이 어려운 주제를 대하는 수많은 마음들이 결국에는 인간애와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사랑의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그러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법이라는 도구의 사각에서도 한 명의 인간으로써 존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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