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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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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호
댓글 0건 조회 3,079회 작성일 22-04-05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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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프란츠 카프카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언제 어디서라도 접할 수 있고 짧고 간결한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문학에서도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형식을 갖춘, '스마트 소설' 등으로 불리는 이 장르의 부상이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명작 스마트 소설」은 이런 스마트 소설의 유래가 될 만한 외국 작품들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미니 픽션, 손바닥 소설, 엽편 소설 등으로 불리는 이 문학 장르는 이미 있었던 소설 형식입니다. 일반적인 단편 소설의 분량과 형식을 갖추지 않아 비주류 문학으로 존재하다가,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문학 장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소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짧은 분량 안에 소설이 가질 수 있는 감동과 반전 공감을 끌어내다 보니, 짧은 만큼 촌철살인의 기지와 간결함을 취한 은유와 상징, 삶에 대한 통할이 더욱 돋보이는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작 스마트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소설은 프란츠 카프카의 「독수리」였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한 작가로 「선고」 「변신」 「유형지에서」 등의 단편과 「실종자」 「소송」 「성」 등의 미완성 장편, 작품집 「관찰」 「시골 의사」 「단식 광대」 등 많은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카프카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과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에 대한 통찰을 그려내,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은 작가입니다. 「독수리」는 카프카가 집필한 많은 단편 소설 중 가장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인간의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실존의 불완전함과 구속, 그리고 해방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낸 소설이었습니다.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독수리에게 발을 찢기고 있는 주인공에게 신사는 말합니다. "왜 그냥 당하고만 있나요?" 이것이 그의 첫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대항할 힘도 무기도 없습니다. 게다가 독수리가 왜 자기를 공격하는지도 모릅니다. 목숨이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 처해 순간순간 끔찍한 고통 속에 있을 뿐입니다. 신사는 얼마나 아프냐는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이 또 말합니다. "반 시간 쯤 기다릴 수 있겠소? 독수리를 떼어놓는 일은 내 몸도 훼손할 수 있으니 대신 총을 가져오겠소." 라고... 목숨이 촌각을 달리는 사람에게는 반 시간이 영원한 시간이 된다는 걸 신사는 모르는 듯, 타자의 고통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는 계속 신사다운 태도를 보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합니다. "도와주겠소. 하지만 우선 집에 가서 총을 가져와야 하므로 당신은 삼십 분은 기다려야 된다오."


  독수리는 아마도 인간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 정체를 알 수 없는 적, 지배와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자, 피할 수 없는 운명, 이 모든 것들의 대명사로 대치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규정하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름을 불리든 간에 분명한 건 독수리는 그 어떤 불가항력적인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목을 졸라 물리치려 해도 독수리는 그의 힘을 넘어가는 엄청난 존재이며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비극적 그 무엇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실존의 처절한 현주소일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카프카의 소설이 독수리와 나와의 적대적 상황에다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독수리와 나만 존재했다면 관념소설로 흐르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3의 인물인 신사가 등장함으로써, 신사라는 타인의 설정으로 인해, 소설은 깊이와 사실감과 슬픔이 말할 수 없이 더해졌습니다. 누군가가 옆에 왔었지만, 그는 독수리 못지않게 잔인한 느낌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카프카는 신사의 존재에서 또 하나의 독수리를 본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혹시나 현대를 사는 우리도 소설에 나오는 신사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닐런지 싶습니다. 눈을 뜨고서도, 고통 받는 사람 곁에 있으면서도... 신사는 말합니다. "아니, 왜 가만히 당하고 있는 거요? 그렇게 참고만 있다니! 총 한 방이면 해결된 텐데."라고.


  신사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일에 자신을 왜 희생시켜야 하는가? 총을 가져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는데 굳이 불확실한 방법을 선택해야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신사의 모습에서 또 하나의 독수리를 투영해보는 이유는 그가 취한 행동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주인공을 향한 인류애 없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독수리는 날카로운 부리로 주인공의 발을 쪼고 있었지만, 신사는 날카로운 눈매로 주인공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사가 주인공의 마음에 가시를 박는 순간, 주인공의 발을 쪼는데 만족하던 독수리는 돌연 주인공 입으로 돌진합니다. 애정이 없는 세상 속에서 주인공은 죽음을 통해 해방감을 얻고 자신의 피 웅덩이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계인의 화합과 평화를 노래하는 세계인의 축제,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며칠 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구촌과 인종차별 타파를 외치는 또 다른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의 조 추첨이 끝난 지금까지도 러시아의 침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점령했던 도시를 떠나 후퇴하면서 그동안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에게 자행했던 잔인한 고문과 인종학살의 증거가 속속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유럽 대륙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끔찍한 전쟁범죄의 현장을 우리는 모두 목도하고 있습니다. 쌍두독수리가 나이팅게일을 공격하는 그 현장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흰머리수리. 우리는 이 모습을 답답하게 여기며 세계 열강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우리 자신들의 마음 속에도 우크라이나를 향한 진실된 연민이 있는 지, 한번 돌이켜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Stop the war in 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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