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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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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3,145회 작성일 22-04-0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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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헤르만 헤세

‘끝없는 모순과의 싸움, 투쟁하는 삶’ 

이규섭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Es irrt der Mench, solange er strebt)

-       괴테 ‘파우스트’ 中 -

 

사람들이 실패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데 누가 실패를 마다할까? 가야 마땅한 확실한 길을 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실패를 대비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대처할 수 있다. 실패를 경험 삼을 수 있다면 과감히 도전해볼 것이다. 허나 경험이 되지 못한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였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실패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황의 삶이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이것이 시간의 문제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분석되지 않으므로 실패마저 될 수 없다. 사사로운 의심이 자아를 좀 먹기 시작한다. 계속 가야하나?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그런데 다른 길은 도대체 무엇이 맞는 길인가? 인간의 삶이 방황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면, 우리의 살아감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매 순간의 내딛음인가. 그러나 그래야만 걸을 수 있다면!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라는 <데미안>의 이 유명한 구절의 첫 문장은 미성숙한 상태의 인간이 자신을 감싸는 어떤 한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다는 일반적인 성장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싱클레어가 그러했듯, 알에서 나오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투쟁이다. 그리고 이윽고 알에서 나온 새는 아브락사스를 향해 나아간다. 아브락사스가 무엇인가? 싱클레어는 이를 알기 위해 방황하고,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가 또 회의에 빠지고, 또 다른 대상을 발견하기를 반복한다. 신이자 악마인, 선이자 악인, 행복이자 고통이고, 남성이자 여성인 그러니 그것은 결국 일종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때때로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는 결국 또 다른 알이 된다. 온전한 자기의 세계(自我)다.

 

 소설 속에서 싱클레어의 성장은 상반된 두 세계를 인지하는 데서 시작한다. 소년은 가족과 집으로 대변되는 선함, 청결함, 책임과 의무, 도덕과 아름다움의 공간 속에서 보호받지만, 동시에 세상에는 그와 반대되는 악과 어둠과 더러움과 추잡함의 세계도 있음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 두 세계가 정말 밀접하게 맞닿아 있음에 경악한다. 어린 그에게는 금지된 세계, 깊은 어둠의 세계에서도 한 달음 만에 어머니의 품이라는 원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음에. 그리고 그는 결국 필연적인 외부세계의 침입으로 인해 기존의 작은 세계, 그를 보호하던 안락한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나는 내 구두에 더러움을 묻혀왔다. … 어머니가 알아서는 안 되는 손들이, 그 앞에서는 어머니도 나를 보호할 수 없는 손들이 나에게로 뻗쳐 오고 있었다.”

그 고통의 과정에서 그리고 조금의 우연(데미안과의 만남)을 통해서 싱클레어는 독립된 개체로써의 삶을 시작한다. 더 이상 그는 가정의 울타리, 알 속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꿈속에서 그는 자주 그의 이상을 만나고, 현실에서 이를 그려내어 실체화하려고 애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형상을 그려낸다. 싱클레어는 그 안에서 데미안의 모습을 본다. 이윽고 마지막의 순간에 다다라서야 그는 데미안과 하나가 되고, 내면의 거울을 보는 것으로 올바른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에서 성장은 껍질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된다. 그것이 그저 소설속에서 말하듯 선과 악, 남과 여, 빛과 어둠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그 한편에서 다른 편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비되는 둘의 공존은 곧 모순을 의미한다. 결국 껍질의 인식은 문제의식의 확인이고 인간의 삶이 불러오는 모순성을 자각하는 데서 온다. 우리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방향을 선택하고 당당히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 안의 세계가 지향하는 그 방향은 현실속에서 그 이상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이상에 다가가는 과정 하나 하나가 또 다른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운명을 물결을 거스르는 이에게 생기는 마찰력처럼 모순은 괴기스러운 파열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더 옳은 행동을 하려고, 더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삶은 매 순간 또 다른 죄의식과 패배감에 젖어 들게 만든다.

 

…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러니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빌어먹을 모순 때문이다. 결국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마주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는 것, 우리가 외면했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이 우리의 삶과 마찰하며 빚어내는 부조리의 고통이다. 그 괴리가 우리를 끝없이 괴롭힌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음의 증거이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면. 그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타성에 젖은 삶은 느끼지 못할 감각이다. 동물적 본능과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흐르는 대로 살 뿐인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징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 뿐이다.

 

 100년이 넘은 소설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적 무결성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대신 사람들은 <데미안> 속에서 방황하며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데미안(Demian)은 반인반신(Daemon)처럼 보이기도하고, 악령(Demon)처럼 보이기도 한다. 데미안의 목소리는, 자기 안의 세계에서 내세워지는 합리성은 통념을 부수는 파격이자 신념이면서 동시에 깊은 곳 욕망을 대변하는 달콤한 유혹이다.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은 절대진리를 찾는 것은 아니기에.

 

그러나 한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다. 그래서 한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 성장의 고통 뒤에 반드시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알고 있다면 이토록 방황하지 않으리라. 인간은 불완전하다. 삶이 만드는 모순된 상황, 모순된 행동, 모순된 ‘나’ 속에서 그 사실을 여지없이 느낀다. 그러나 <데미안>은 고통에 좌절하는 세상의 작은 알들에게 헤세가 남기는 한 권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절망적이고 기괴한 싱클레어의 삶 속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다. 삶을 부정하기 위한 절망이 아닌, 극복해야 하는 절망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은 삶의 고통을 뻔히 알면서도, 그 고통 안에서 언제나 희망의 편린을 찾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스러지지 않으려 일부러 소리 높여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 신념은 삶의 곳곳에 널린 고통의 순간보다 그보다 더 많이 산재되어 있는 많은 가치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방황하는 인간의 자아는 더 단단해지고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모순의 순간에 견디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가치있다. 고통 속에서도. 잊을 만하면 불현듯 나타나는 이 끊임없는 모순. 모순이 모순을 낳는 지옥의 굴레 같은 수치스러운 삶의 발걸음 속에서도.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할지 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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