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페이지 정보

본문
오직 두 사람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소수민족이 있어요. 이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생활해요. 시간이 흘러 고향에서는 러시아어가 표준어가 되었고, 같이 이민해 온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등져요. 마침내 둘만 남아요. 둘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이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들일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둘, 최후의 두 사람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의절해요. 그러곤 수십 년 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결국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요.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 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주인공 현주는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자란 딸이다. 오빠인 현석과 막내 동생 현정이는 아버지에게 논외의 존재이다. 현주가 대입을 마친 후, 아버지와 단둘이 유럽 여행을 간 것을 계기로 현주는 아버지 편, 현석과 현정은 엄마 편으로 가족이 분리된다. 즉, 아버지에게는 현주만 남았다.
현주는 살면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현주는 아빠 딸이야"라는 말을 들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에게 전전긍긍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친구들과 헤어지고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이가 들어 학원 강사로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밤에 일하다 보니 몇 없던 인간관계도 정리되어 이젠 현주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만이 남았다.
결국 서로에게 서로만이 남은 것이다. 마치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소수민족처럼.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엄마와 이혼 후 아버지의 복잡했던 여자관계가 드러나났고, 이를 수습하려던 현주는 바닥으로 내몰렸다. 그때, 현주는 아버지의 그늘을 자각하고 이제라도 빠져나오고자 동생이 교수로 일하고 있는 미국으로 떠난다.
오직 둘만 남았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자들이 이젠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각자는 언어의 독방에 갇혀 대화하지 못한다. 긴 어둠이 지나고 현주에게 아버지가 암에 걸려 죽음을 앞뒀다는 연락이 와 현주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모국어였던 아버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던 아버지의 임종을 바라보며 유일한 소수민족의 생존자로서 삶을 준비한다.
나에게도 이런 아버지가 있다. 형보다 나를 편애했고, 어린 나이에 알아차릴 정도로 아버지는 내 편이었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잘 따랐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대학교 전공을 전기전자공학부로 선택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이때까지는 나에게 아버지가 모국어였다.
내가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 아버지는 본인의 오랜 꿈이었던 사업에 대해 가족에게 얘기하셨다. 안정을 추구했던 어머니와 형은 사업을 반대했고, 나 역시도 반대했다. 아마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배신감을 느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가족과 아버지 사이에는 벽이 생겼다.
그래도 꼴에 "아빠 아들"이라고, 일 년에 두세 번 찾아뵈었다. 갈 때마다 똑같은 사업 얘기를 들어야 했지만 원인 모를 죄책감과 의무감에 묵묵히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이제는 아버지의 모국어가 나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결국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사업을 시작하셨고, 우리 가족이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오탈자가 가득한 문자를 보며 바쁘다고, 다음에 뵈러 가겠다는 답장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버지의 고독을 뒤로한 채, 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괜찮은 척 하며 일상으로 돌아가야했다.
다들 무언가 상실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상실의 아픔에 슬퍼하지만, 이내 괜찮은 척하며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현생을 살아갈 것이다. 작가는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고 말한다.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고. 우리는 모두 잃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그 이후'의 삶이 있으니, 이후의 삶을 견디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 이전글브람스의 밤과 고흐의 별 22.06.02
- 다음글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22.05.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