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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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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2,883회 작성일 22-06-0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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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당신의 고통이 우리에겐 난해하기만 할 때>

 

이규섭

 

 여기 멀쩡하게 잘 살던 남자가, 어느 날 아침 복도 창가에 날아와 앉은 비둘기 한 마리를 보고 공포에 몸서리 친다. 비둘기의 초점없는 눈동자에,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그 눈꺼풀이 셔터 마냥 위아래로 희번뜩 거리는 모습에 (남자가 단순한 조류공포증이 아님을 의미한다.) 장황한 공포심을 묘사하는 이 남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피난으로 끔찍한 유년시절을 겪고, 전쟁터에서의 군생활마저 버텨낸 남자에게 도대체 비둘기 한 마리가 어떤 공포를 심어줄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한 일이다. 그러나 마냥 그런 일로 치부하기에 그가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비둘기가 남긴 끔찍한 감정은 확장되고 세밀해져 남자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남자의 하루는 통째로 망가진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회피의 감정이다.

 남자는 없는 형편에 조금씩 자신만의 온전한 보금자리를 완성해왔다. 그렇게 오래된 건물 제일 윗층의 단칸방은 그의 삶에 딱 맞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이제 잔금을 치르고 그 공간을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그날 새벽에 복도 창가에 앉은 비둘기 한 마리에 느낀 공포감 때문에 그 모든 계획을 내팽개치고, 일터 근처에 숙소를 예약하곤 벌벌 떨고 있는 꼴이라니. 온갖 근심 걱정에 휩싸여 일을 망치고 또 그것이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끝내 그는 다음날 자살할 것을 결심한다. 이것이 조나단 노엘이 맞이한 하루의 일이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던!


 인간은 매우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순간적인 감정적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부분의 감정적인 충동이 호르몬과 큰 연관이 있는 만큼, 어쩌면 생물학적인 육체를 가지는 순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은 스스로는 굉장히 이성적이면서도 타인의 시선에서는 꽤나 비이성적이고 모순적인 태도가 범벅이 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는 곳곳에 비둘기가 숨어 있다. 어느 날 이유없이 기분이 나빠져 있는 직장 상사나, 오늘따라 말수가 확 줄어든 친구 녀석이 그렇다. 그리고 더 종잡을 수 없는, 때로는 이유를 들어도 납득을 할 수 없는 당신의 감정이 그렇다. 나 역시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비칠 것이다. 그 감정은 정말 섬세해서 내 안에서는 너무 가깝고 생생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기괴하여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다. 

 이 자연스럽고도 쓸모없는 걱정거리의 큰 문제점은 방치했을 때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처럼 ‘비둘기 이슈’는 하룻밤 지나고나서, 특히 더 큰 감정을 거치고 나서 돌아보면 별 것 아닌 일이었음이 대부분이다. 허나 논리적 사고와 다르게 감정은 우리를 몰입하게 만들기에, 그 연쇄 고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득, 조나단 노엘이라는 이 남자가 계속 혼자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독신인 것을 떠나서 (정확히 말하면 결혼에 실패하고 혼자 남은 것이지만) 그는 어떤 사람과도 교류하지 않는 사람이다.  집을 나설 때 마다 마주치는 로카르 부인과 10년 동안 어떤 교류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직장에서도 은행원 경비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만 충실하였다. 조나단 노엘은 혼자의 삶으로 안정되어 가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의 생각만큼이나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이며 최선은 아니더라도 꽤나 나쁘지 않은 선택임은 분명했다. 지난 수십년간 그가 겪어오며 확신한 삶의 형태,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만의 작고 소박하지만 안락한 삶말이다. 조나단 노엘이 이렇게 성장한 것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이 날 절망에 빠지게 된 것 역시 분명 그가 혼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감정적인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그 상황을 인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인지하더라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고, 이상하다고 느끼더라도 또 어느새 끓어오르는 감정에 휘둘려 다시 혼란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감정에 몰입하고 또 몰입하는데 쓰일 것이다. 그 감정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환기뿐이다. 감정의 환기. 조나단 노엘에게는 천둥번개와 쏟아진 소나기가 그러했다. 그러나 천재지변은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날 밤 날씨가 좋았다면 조나단 노엘은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아침에 기분이 좋아진 노엘이었지만 집에 도착할 즈음 계단을 5개 남겨놓고 다시 비둘기를 떠올리고 만다. 천둥과 소나기는 이제 없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공포가 떠오르자 조나단은 다시 긴장하며 발걸음을 망설인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순간 그는 어떻게 공포와 마주해야 했던 걸까? 그 순간 그에게 들린 것은 아침 일찍 일어난 건물 내 이웃주민들이 내는 목소리와 냉장고 소리, 낮게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였다. 그리고 친숙한 냄새, 라살 부인의 커피 향기였다. 이 별 것 아닌 간접적인 인간 관계가 그의 공포심을 녹인다. 그리고 마침내 층계에 들어섰을 때 비둘기는 온데간데없고, 푸르딩딩한 새똥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아침에 로카르 부인에게 부탁한, 그러나 기대하지 않은 호의였다.

 

소설의 첫 문장에서 조나단 노엘은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가진다. 우리가 늘 그러하듯이.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비둘기 사건이 터졌을 때 조나단 노엘은 이미 나이 오십을 넘겼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지난 20여년의 세월을 뒤돌아보며 이제는 죽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심각한 일도 결코 일어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 그의 믿음에는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살다보면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많이 마주치기 마련이다. 이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 주의하자. 능력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말은 더 큰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냥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도태된 자들의 걱정거리로 치부되는 능력만능주의적 해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삶속에는 맞이하는 어려움들은 다양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충동적이기에 그 내용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 유대가 주는 소중한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는 다양하다. 굳이 하나만 정답일 필요가 있을까? 그저 지나가면서 나누는 상투적인 한, 두 마디 대화가, 표정과 몸짓이, 마음 속의 분위기를 환기시켜 줄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문득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어찌보면 별일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혼자서는 우연에 기대어야 하는 일들이 함께 할 때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대단하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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