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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 편견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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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승현
댓글 0건 조회 3,538회 작성일 22-04-0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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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1865년, 노예제 폐지를 이유로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결과, 노예제를 주장했던 남부연합군은 패배했고, 미국 전역에서 공식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었다.하지만,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여전했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자 작가의 고향이었던 1920년대 미국 앨라배마는 남부 중에서도 농업 중심의 도시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흑인에 대한 무차별적 차별과 혐오가 만연했다. 그런 시대적 모순을 비판하기 위해 작가는 ‘스카웃’이라는 6살 소녀의 시선으로 사건들을 서술하였고, ‘앵무새’라는 우회적인 소재를 활용하여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시사하였다.

 


『줄거리』


철없는 어린 시절, ‘부 래들리’ 괴롭히기

 

    ‘진 루이스 핀치(스카웃)’는 6살의 소녀로 말괄량이 선머슴 같은 소녀다.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변호사이고, 너무나 자상하여 동네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스카웃’은 친오빠 ‘제레미 핀치(젬)’와 친구 ‘찰스 베이커 해리스(딜)’와 노는 것을 즐겨했지만, 그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부 래들리’네 집에서 노는 거였다. 엄밀히 말하면, 15년간 단 한번도 집 밖을 나오지 않은 '부 래들리' 얼굴을 보기 위해 알짱대는 것이다.


‘부 래들리’는 마을에서 각광받던 래들리 가문의 작은 아들로, 10대 때 친구들과 잘못 어울려 재판소 직원을 감금하고 폭행을 했다는 죄목으로 판사 앞에 섰다. 다른 친구들은 감옥이 아닌 주립 공업학교로 강제전학 결정을 내렸지만, 아버지였던 래들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판사에게 약속하며 집으로 데려갔고, 이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스카웃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늦은 밤, 젬, 딜과 함께 몰래 부 래들리의 집에 놀러 갔다. 도둑인 줄 알고 놀란 ‘부 래들리’는 공포탄을 쏘았고, 총소리에 놀란 젬은 울타리에 바지가 걸려 벗겨진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다음날 바지를 찾으러 갔던 젬은 울타리에 찢긴 바지가 정성스레꿰매져 나무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흑인 ‘토마스 로빈슨(톰)’을 변호하는 아버지

 

“깜둥이 변호를 맡고 있으니깐 너네 아버지는 깜둥이 애인이야!”

    '밥 이웰' 집안의 딸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잡힌 흑인 ‘톰’의 변호를 스카웃의 아버지인 '핀치' 변호사가 맡게 되었고, 그는 흑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이웃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딸 스카웃을 다그치며 아버지를 조롱하는 친구들에게 주먹질을 하지 말라고 조언하였고, 흑인교회에도 찾아가 톰의 가족들을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톰을 변호하고자 했던 이유는 편견으로 인한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밥 이웰은 평소에도 가정폭력을 자주 휘둘렀고, 그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를 맺지 못했던 딸 '마옐라'는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집안일을 도와달라며 톰을 불렀다. 허나, 톰에게 사심을 품고 먼저 입맞춤을 한 마옐라의 모습을 발견한 밥 이웰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여 딸을 폭행하였고, 이를 감추기 위해 ‘톰’이 자신의 딸을 강간하고 폭행하였다고 신고하였던 것이다.

핀치의 모든 변론이 끝난 후, 배심원들과 판사들은 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판결은 톰의 유죄였고, 억울함을 참지 못한 톰은 감옥에서 탈옥을 시도하였으나, 17발의 총을 맞고 결국 사망하였다.

 


드디어 만나게 된 ‘부 래들리’

 

   밥 이웰의 민낯을 알게 된 동네 이웃들은 밥 이웰을 배척하였고, 그는 진실을 떠벌린 핀치 집안에 복수를 다짐하였다. 짙은 어둠이 드리운 밤, 인근 수풀에서 칼을 가슴에 품고, 핀치의 자녀들 ‘젬’과 ‘스카웃’을 향해 습격하여 ‘젬’은 팔이 부러져 기절하였고, ‘스카웃’ 또한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나타나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밥 이웰을 찔렀고, 그가 바로 ‘부 래들리’였다. 그렇게 부 래들리는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느낀점』


표면적으로는 인종차별, 속내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편견과 혐오

 

    이 책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났던 편견과 혐오의 대상은 ‘톰’과 ‘부 래들리’, 그리고 ‘밥 이웰’이다.


    ‘톰’은 단 한 가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던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감옥에 가게 되었다. 이는 밥 이웰이 잘나서가 아니다. 사실 그는 최하위계층이었던 흑인들보다도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 인격적으로 밑바닥까지 드러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백인이었다.

결국, 배심원들은 밥 이웰에게 유리한 판결을 준 게 아니라, 백인들 자신들의 흑인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결코 놓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위 ‘비빌 언덕’이라고 표현되듯이 백인사회에 있어서 흑인이라는 다수 집단에 대한 우월적 지위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면에서 여러 편의를 제공해주지만, 결정적으로는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것이다. 가진 게 별로 없고, 내세울 게 없을수록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는 것처럼, 그들에게 피부색은 그러한 심리적 소속감을 주고, 자신들을 우월하게 평가받기 위한 이기적인 산물이었던 것이다. 


    ‘부 래들리’는 같은 백인이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과 과거에 의한 편견으로 또 다른 고통을 받았다. 오랫동안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서, 유령·해골·짐승과 닮았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고, 사람들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치부하였고 더욱 더 그를 고립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아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평범하고 착해 보이는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고, 살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부 래들리가 이러한 선택을 했던 이유는 그가 어렸을 적 했던 일련의 행동들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편견과 혐오 때문이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삼삼오오 모여서 손가락질하며 혐오하였고, 동네의 악으로 취급하며 부정적인 편견을 퍼뜨렸다. 결국,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15년 동안이나 스스로를 가둔 채,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그릇된 모습은 그 누구도 먼저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잘못만을 따지며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 래들리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마을 사람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그를 도리어 유령 취급하면서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고, 배척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편견을 정당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알 것이다. 자신들의 편견으로 인해 부 래들리가 도망쳤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더 큰 편견과 혐오로 이를 뒤덮었고, 결국 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밥 이웰’은 사회 계층에서의 편견을 받았다. 물론, 그는 ‘핀치 변호사’의 두 자녀를 죽이려고 했던 범죄자이지만, 그가 이토록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이유도 편견이다. 핀치 변호사에 의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면서, 마을 사람들은 이전보다 그를 더욱 멀리 하였고,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흰 피부밖에 없었던 그에게, 같은 백인 집단 내에서도 소외되면서 사실상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셈이다. 결국, 같은 집단 내에서도 가문, 능력, 부, 명예와 같이 또 다른 피부색깔로 그들을 갈라놓고, 끝없는 편견과 혐오를 씌우며 스스로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이기적인 인간의 면모가 낱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앵무새 죽이기의 뜻

 

    앵무새는 인간에게 아무런 해가 없는 동물이다. 심지어, 아름다운 노래를 지저귀고, 사람들의 언어를 따라부르며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고마운 대상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이렇듯 아무런 해가 없는 것을 죽인다는 뜻이다. ‘부 래들리’와 ‘톰’은 ‘밥 이웰’과는 다르게, 평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만 했을 뿐, 해를 가한 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각의 이유로 편견을 가졌고, 결국 한 마리의 앵무새였던 ‘톰’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고, ‘부 래들리’는 죽음에 가까운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당했다.

 

    10년 전,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불과 60년만에 민주적으로 뒤바뀐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에 놀랐고, 이런 시대에 태어나게 된 것에 굉장한 감사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2022년에 다시 읽어본 책에서는 많은 씁쓸함을 느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겪고 있는 남녀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정치갈등들이 보이지 않는 피부색으로 편가르고,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더욱 혐오하고, 심리적 우월감을 갖기 위해 이기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모습들이 마치 시대를 역행하고, 오히려 퇴보한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지혜를 얻듯, 과거를 반성하며 새로운 앵무새를 죽이지 않기 위해 집단의 이익보다 스스로의 양심을 먼저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양심은 '나'부터 시작할 수 있으니깐.


“The one thing that doesn’t abide by majority rule is a person’s conscience.”

“양심은 결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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