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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핀 봄날, 누군가의 몽유록(夢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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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빈
댓글 0건 조회 2,777회 작성일 22-04-0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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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이 핀 봄날, 누군가의 몽유록(夢遊錄) ”

- 고전 소설 「운영전」을 읽고 -

 


 어딘가 차갑기만 했던 회색빛 건물들 사이에도, 목련이 포근하게 스며들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자리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맞이한 봄은 어제보다 차분하고 내일보다 아득하게 찾아왔다.

그 고요함 속을 잠시 거닐다 마주친 한 그루의 목련은 그 곁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토록 은은한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햇빛이 닿은 꽃송이의 새하얀 온기를 가만히 마주하다, 문득 오래전 읽었던 한시(漢詩)의 어느 구절이 떠올랐다.

 

故宮花柳帶新春                고궁의 화류는 새 봄빛을 띠었고,

千載豪華入夢頻                오랜 세월의 호화함은 자주 꿈 가운데 들었구나.

 

 ‘수성궁 몽유록’ 이나 ‘운영전’ 으로 불리는 고전 소설의 주인공인 운영이 쓴 시의 이 구절은 어딘가 쓸쓸하게 찾아온 봄에 떠올리기 충분했고, 그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운영전의 서사는 가난한 선비 유영이 인왕산 기슭 수성궁 터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김진사와 운영을 만나 그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시작된다. 세종대왕의 왕자 인평대군이 거느린 10명의 궁녀 중 하나였던 운영은 인평대군의 명령에 의해 궁궐에서만 머물며 다른 궁녀들과 시를 짓고 외모를 가꾸며. 문학적 예술성을 다듬는 일에만 몰두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영은 젊고 수려한 인평대군의 벗이자 뛰어난 문인(文人) 김진사를 궁궐에서 처음 만난다. 인평대군의 명으로 운영이 김진사를 위해 벼루에 먹을 갈게 되는데, 이때 그의 빼어난 글솜씨에 운영이 반하는 장면을 우리 문학은 이렇게 표현한다.

 

김 진사가 글을 쓰다가 우연히 운영의 손에 먹물이 튀는데, 운영은 이에 감격하여 손을 씻지 않는다.

 

그렇게 둘은 사랑에 빠졌고, 인평대군의 눈을 피해 비밀스런 만남을 이어 가지만 그 불행한 만남의 끝은 점점 비극으로 나아간다. 외부인과 절대 통하지 말라는 대군의 말을 어긴 운영과 그 사랑의 간절함을 놓지 못해 위험을 감수하던 김진사는 결국 관계가 들통나게 되고 주변의 도움으로 목숨만은 부지한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서로를 향한 그리움만은 용서하지 못한 둘은, 슬픔 속에 스스로 목숨을 놓아 하늘에서 만나는 결말을 맞이한다.

 

 김진사와 운영이 선비 유영의 꿈 속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히 남녀간에 이룰 수 없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넘어 듣는 이에게 많은 감성을 전해준다.

 ‘작자 미상’ 이라는 저자의 무형성(無形性)은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무한성(無限性)을 갖는다. 저마다의 사랑에, 간절함에 그리고 그리움에 담아 나의 이야기처럼 공감하고 눈물지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 줄의 시로 인평대군과 운영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김진사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한마디 말에 인품을 담고 진심을 전하는 방법에 대한 큰 감명을 준다. 비록 가상의 대화일지라도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덧 나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 옆 누각에 앉아 인평대군, 김진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이 뱉는 격식 모양이 딱딱하게 굳어진 말을 가만히 곱씹으면 안에 감춰진 비단 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등장인물들이 대화처럼 나누는 한시(漢詩)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문학적 가치와 예술성에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南天鴻雁鳴悲歌               남쪽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는 구슬피 우는데

旺麓西宮豈寥襾               인왕산 아래 수성궁은 어찌하여 쓸쓸함만 드리웠나.

欌懷蝶夢每沾襟               책장 속 호접몽 같은 이야기는 볼 때마다 옷깃을 적시고

不止漏噺曉星頋               그치지 않는 눈물 속 이야기에 새벽 별빛만 고요하네.

 

- 2014년 봄, 「운영전」을 읽고 -

 

 고등학생 때 운영전을 처음 읽고 그 감상을 담아 직접 지어낸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그리고 대학원생이 된 지금, 문득 피어난 봄을 보고 떠오른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조용히 읊조렸다. 하늘과 산, 나비와 새벽 별빛, 이렇게 어여쁜 것들을 주인공 삼는 글을 마주한 적이 언제였을까.

 단단한 구조 속에 싸인 교과서들, 명분과 형식이 핵심이 되는 보고서들, 감성보다는 이성의 가치를 우선하여 세상을 말하는 논문들. 물론 이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봄이 마음으로 느껴지는 날에는 한 줌의 햇살과 두 움큼의 향기 그리고 아름이 벌도록 피어난 꽃들을 벗님 삼아 문학 한 권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보드라운 그 손으로 표지를 열고 덮는 사이, 책엽 틈으로 스며든 온기만큼 우리 마음에 더 포근한 봄이 찾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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