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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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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섭
댓글 0건 조회 3,159회 작성일 22-03-0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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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이규섭

 

지난 수천 년의 기록된 역사를 돌이켜본 뒤,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아,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긴 시간 동안 많은 사건을 겪은 뒤에도 우리가 또 얼마나 더 많은 갈등에 직면했는지를 보며, 우리가 과거의 실수를 계속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시 외친다.

‘아, 인간(자신 제외)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Homo sapiens. 우리 종을 부르는 이름이다. 아종의 이름은 한술 더 떴다. Homo sapiens sapiens. 슬기롭고 슬기로운 사람.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여기에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어리석을지라도, 적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 가장 슬기롭다는 확신과 자만이 담겨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세상은 이제 사람들투성이고, 사람만큼 이 지구의 모든 것을 극적으로 바꾸는 존재는 드문 것만 같다. 진화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원숭이 이야기가 나온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길이 날뛰었던가. 이러한 관점에서 내심 우리 모두는 인간이 지구상 모든 생명체 중 가장 특별한(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까부터 나는 인류를 ‘우리’라고 부르고 있다. 세계 각지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며, 당장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도 누군지 모르면서 왜 이 모두를 친근하게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언어학적 특성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분명 우리말에서는 영어와 비교했을 때 ‘People’이나 ‘I’여야 하는 문장에서 빈번하게 ‘우리’를 사용하는 ‘우리’ 과남용의 특징이 있긴 하다. 하지만 하라리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우리말의 특징이 인류의 특성을 더 잘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의 강한 결속력을 만들어 유례 없는 집단행동을 가능케 하는 능력. 저자는 이 능력이 깨어나면서 인류는 다른 인류의 아종을 누르고 호모 사피엔스가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능력은 종의 생물학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현대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지만 엄밀하게는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아종의 교잡종이다) 이를 ‘인지 혁명’이라고 칭한다.

 

허구의 등장

저자는 여타 동물들의 예를 통해 일반적인 집단행동의 규모가 얼마나 한정적인지 지적한다. 예를 들어 대장 원숭이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소속 원숭이들과 교류하면서 친밀감을 공유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방식으로 연결된 조직의 크기는 한정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는 수백 명은 고사하고 수천 명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고, 나아가 국가적인 행동에는 수백만, 수천만 명 단위의 결속력을 보일 수 있다. 집단 내 절대다수와 일면식도 없음에도!

인지 혁명은 단순히 인간의 두뇌 능력이 향상된 것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 가상의 실재를 인지하는 능력을 얻게 된 점에서 혁명적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만들어내고, 이를 공유하게 되면서 인류는 사회적 존재로서 거듭난다. 화폐, 법률, 종교는 작가가 제시하는 가장 대표적인 허구적 개념이자 우리가 공유하는 ‘상상의 질서’다.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우리는 모두 이 개념을 공유하고 이해하며 인정한다. 객관적 진실이 아니며, 이를 증명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킬 능력이 있다. 작가는 이를 신화적이라고 표현한다. 인류의 태동기에 사회 핵심기능에 종교가 자리한 것은 이를 통해 설명된다. ‘상호 주관’이란 많은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연결하는 의사 소통망 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주관은 개인의 변화로 사라질 수 있지만 상호 주관은 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다. 상상의 질서와 함께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거듭났다.

 

 만일 나 혼자 달러나 인권, 미국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해도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며, 이를 변화시키려면 수십 억 명의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려면 정당이나 이념운동, 혹은 종교적 광신집단 같은 복잡한 기구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복잡한 기구를 만들자면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을 협력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런 일은 오로지 그들이 뭔가 신화를 공유하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그러니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푸조를 해체하려면 프랑스 법률체계처럼 그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상상해야 하고, 프랑스 법률체계를 해체하려면 그보다 더강력한 무엇, 예컨대 프랑스라는 국가를 상상해야 한다. 국가마저 해체하려고 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

 

상호 주관적 실재는 개인의 부정이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기업이라는 개념은 사장이나 종업원들이 죽는다고, 공장이 다 문을 닫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법인을 구성하는 모든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이 새로운 것으로 물갈이 된다고 하더라도 푸조는 그대로 푸조일 것이다. 인류 문화 대부분은 이렇듯 관념적인 것, 가상의 실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비중 역시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 이 문화적 산물들은 생물학적 유전으로 이어지는 특성의 것이 아니다. 이들은 후에 다가올 농업 혁명과 과학혁명의 단계를 거치며 더 고도화된다.

 

과학 : 무지에 대한 인정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과학은 왜 유럽에서 발전했는지 말이다. 근대 제국주의 이후 인류가 통합되기 이전, 동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문화권에도 다양한 기술들이 있었다. 하라리는 이 둘의 차이를 ‘무지에 대한 인정’에 있다고 보았다. 현대 과학의 학문적 특성은 우리가 모든 것은 알지는 못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 더 나아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때 틀린 것으로 드러나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이는 종교(적어도 현대 과학의 태동기에 존재했던 종교학)를 포함한 종래의 어떤 전통 지식과도 다른 부분이었다. 이 유연성과 확장성은 인간에게 방대한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한 인류 지평의 확장은 현재 진행형이다.

과학에는 도그마(Dogma,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널리 퍼지고 발전될 수 없다. 과학의 발전에는 투자가 필요하고, 투자를 위해서는 합목적성이 필요하다. 과학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아니더라도, 이데올로기와 결부할 때에 더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생태가 확보된다. 현대 과학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힘을 등에 업고 발전했다. 진리가 아닌 유용성이 목표가 되자 과학은 우리 삶을 뒤엎을 정도로 변혁을 가져다주었다.

 

 거시적인 시선은 언제나 논리 전개에 취약점을 안게 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통합된 인류사의 커다란 흐름을 효과적으로 정리해 설명한 점에서 저자는 놀라운 통찰을 발휘하고 있다. 인류 개개인의 지성은 크게 발전하지 않았음에도, 인류 전체가 만들어낸 가상의 실재는 더 폭발적으로 그 몸집을 불리고 있다. 세 차례의 혁명 끝에 이제 인류는 더 격동하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묻고 있다. 고도화된 기술은 인간의 정의가 무엇인지 또 다른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지난 24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작은 교전인가 의심했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온 오보인가 의심했다. 21세기에 침략전쟁이라니!

제국주의의 종말과 함께 세계는 유례없는 평화 시대를 맞이했다. 냉전 이후 채 50년이 되지 않아 아직 지금의 평화 시대가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본격적인 안정기의 시작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하라리가 지적한 대로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전쟁으로 얻는 영토와 자원의 확보가 전쟁 비용보다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또 하나로 통합된 인류 공동체가 형성된 이상, 전쟁이라는 혼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지탄을 각오해야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기에 긴 시간 불완전하게나마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되었고, 군비 경쟁의 심화 속에서도 전쟁은 동네 싸움에서 누가 먼저 ‘선빵’을 때리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같은 일이어야 했다.

이번 소식이 유독 슬펐던 이유는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뉴스가 나온 후에 며칠간 이어졌던 미묘한 기류에 있었다. 국제 사회는 우리가 순진하게 믿었던 자연스러운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았다. 각국의 이해관계는 침략 전쟁을 제재하는 결정을 망설이게 했다. 그 주춤거림의 시간 동안 사람들은 심심한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면서도 전쟁의 여파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이때 느낀 씁쓸함은 여전히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국가에 사는 시민으로서 우리네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개인적인 감상만이 아니었다. 최악의 선례를 남기고 말았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평화의 기반 중 하나. 인류 공동체가 형성된 이상 전쟁은 비효율적이며 그래서 결코 쉽게 일으킬 수 없다. 일으키려는 사람에게는 막대한 지구 공동체 내부의 반발을 감내해야 한다는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정치적 상황에 의해 너무나 쉽사리 깨졌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려오는 긍정적인 뉴스들 (경제적 제재, 우크라이나를 향한 각종 기업들의 지원, 유럽 국가들의 지지)은 매우 다행스러운 소식이지만, 분명 미묘했던 주춤거림의 며칠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가 시작되자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 며칠 간의 불온한 기류는 자연스러워야 했던 국제사회의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세계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수 있었던 가능성이었다고 본다.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 한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고자 할 때 국제사회가 이를 방관할수도 있다는 선례가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영불편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우리 종이 만들어낸 구 시대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득 종의 발전과 개체의 삶의 질이 무관하다는 점을 떠올린다. 사회를 안정적으로 지탱하던 계급제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먼 훗날에는 우리가 믿는 인본주의가 현 시대에 그치고 마는 하나의 신화적 사건으로 끝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라리는 사회가 구성되고 발전하면서 ‘바보들을 위한 생태적 지위’가 확보되었다고 말했다.  인간의 존재를 고민하는 문제는 이어질 것이고, 그렇기에 전쟁은 끝끝내 끔찍하고 있어서는 안될 일일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으로도 어려운 상황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미 시작되어버린 이 전쟁이 더 성숙한 시민사회가 되기 위한 국제사회의 더 좋은 선례로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그보다 더욱 큰 마음으로 전장에서 스러져간 많은 생명들에게 깊은 애도를, 앞으로 발생할 피해자가 최소화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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